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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이 국내 경쟁력 강화 … 생산성 높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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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경제가 구가한 고도성장은 정부의 강력한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개발 초기 우리나라는 부존자원과 자본축적이 없었으며 기술수준도 낙후해 있었다. 이에 수출전략산업을 발굴해 한정된 자원을 집중 투자하는 한편 대외개방을 적극적으로 확대해 선진기술을 습득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선진국을 추격했다. 이 과정에서 양적으로는 노동력을 중심으로 부존자원을 동원하고 자본을 축적해 높은 수출 성장세를 유지했다. 질적으로는 선진기술을 배우는 계기를 제공하고 또 해외시장에서 외국상품과 경쟁함으로써 생산성 향상을 촉진하는 등 성장과 발전에 역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신성장이론이 등장해 수출 위주의 무역과 성장에 관한 이러한 견해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양적 확대에 의한 성장보다는 기술개발 등을 통한 생산성 향상에 주목하는 신성장이론은 무역으로 발생하는 역동적인 이익의 상당 부분이 지적자산의 전파를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 국가가 세계에 존재하는 지식에 접근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지적자산을 함유하고 있는 자본재(중간재)를 선진국으로부터 직접 수입하는 방법과 무역을 통해 소비재(최종재)에 함유된 지적자산을 획득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상품의 국가 간 거래를 통해 지식이 교환되며, 따라서 무역이 늘어나면 국내 지적자산도 자연 증가한다는 것이다.

수출과 수입 중에 어느 쪽이 기술수준과 생산성 향상에 더 중요한가는 학계의 주요 논쟁거리다. 1993년 세계은행은 동아시아의 경제적 기적에 관한 연구를 통해 수출과 정부의 강력한 수출지원 정책이 높은 수준의 기술을 습득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며 이를 통해 해당 수출기업뿐 아니라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고 성장을 유도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90년대 말 동아시아 경제에 관한 일련의 연구결과는 생산성 향상이 수출보다는 수입과 더 강한 인과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즉 수출 확대와 시장보호보다 관세 인하와 수입 확대 조치가 총요소생산성을 높이는 데 더 기여했다는 것이다. 수입이 늘어나면 국내에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또 수입품을 통해 새롭고 수준 높은 기술을 접할 수 있다는 얘기다.

1986~2003년 한국의 자료를 사용해 분석해 봐도 같은 결과가 도출된다. 먼저 인과관계를 검증해 보면 단기간에 수출이 총요소생산성 제고에 기여한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 이와 대조적으로 수입증가가 생산성을 높여 준다는 점은 통계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수입 증가가 어떤 경로를 통해 총요소생산성의 제고에 기여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수입을 유형별.원산지별로 구분하고 또 그 외에 정부의 소비성 지출과 연구개발 투자를 포함해 분석했다. 자본재와 소비재의 수입이 늘어나면 총요소생산성이 향상된다는 강한 인과관계를 보이지만 원자재의 수입변동은 생산성 향상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또 선진국(G7 국가)으로부터의 수입이 생산성에 뚜렷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결과도 도출됐다.

이 같은 실증분석 결과는 수입 증가가 국내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는 다양한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소비재(최종재) 수입이 늘어나면 국내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져 수입품과 경쟁하는 상품(수입대체재)을 생산하는 국내 회사들로 하여금 기술혁신과 생산성 제고에 더욱 전념토록 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또 자본재(중간재) 수입이 증가하면 국내에 없는 고기술 부품과 소재의 공급이 늘어 국산품의 품질이 개선되고 생산이 특화돼 결과적으로 국내 관련 업계의 생산성이 제고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연구결과는 선진국의 고급 기술이 선진국으로부터의 수입품에 함유돼 국내에 전파됨으로써 국내업계의 생산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대외경제전략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통한 수출규모 확대가 시장을 창출해 성장에 기여한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수출을 통해 기술적.제도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종래의 믿음은 수정될 필요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최근 한국 경제는 생산요소(노동력.자본.기술 등)의 축적이 둔화되고 더불어 경제성장(또는 잠재성장력)이 둔화하고 있다. 그래서 경제성장을 좌우하는 요소로서 생산성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

정부는 수출 확대와 외국인투자 유치 및 경제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많은 국가와 FTA를 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 지역주의가 팽배한 현실에서 FTA의 확대 실시는 피할 수 없는 대세이기도 하다. 획일적이고 지지부진한 다자간 무역협상과는 달리 FTA가 소수의 참여국들이 각자의 다양한 현실을 반영할 수 있고 또 신속한 타결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FTA의 일반적 장점과 더불어 수입이 생산성에 기여한다는 실증분석 결과는 정부 간 협의가 시작된 한.미 FTA뿐 아니라 협의가 부진한 한.일 FTA, 그리고 아직도 논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한.중.일 FTA 등에 좀 더 적극적인 입장을 택해야 한다는 정책적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일반 국민은 FTA를 통한 수출 확대가 가져올 이익에는 동감하지만 수입이 가진 역동성에 관해서는 인식이 높지 않다. 개방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수입 확대가 국제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국내 산업과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피해 때문이다.

그러나 FTA 체결에 따른 피해는 일차적으로는 단계적으로 자유화를 실시하거나 긴급수입제한 조치를 포함하는 내용의 FTA에 합의함으로써 최소화할 수 있다. 이보다 더 근본적으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국제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국내 기업들이 수입 증가에 따라 치열해지는 경쟁을 생산성 제고를 통해 이겨내는 것이다.

김상호 호남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