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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대통령·총리·경제계 모두 규제개혁 강조하지만…재계 신년회에서 ‘규제’ 언급도 안 한 여야 대표

중앙일보

입력

새해를 맞아 청와대와 정부, 경제계가 한 목소리로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2018년 경제정책방향’이 발표된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은 “규제혁신은 혁신성장을 위한 토대”라며 “과감하고 창의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으로 금지한 행위가 아니면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negative) 규제’ 방식과 특정 사업 분야의 규제를 일괄적으로 풀어주는 규제 샌드박스(Sand box) 도입 필요성을 거론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지난 2일 정부 시무식에서 “대담한 규제혁파가 필요하다”며 “규제 샌드박스가 새해 벽두부터 구체화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틈날 때마다 규제혁신을 언급하고 있다.

3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대한상공회의소 주관으로 2018년 경제계 신년인사회가 열렸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3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대한상공회의소 주관으로 2018년 경제계 신년인사회가 열렸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재계의 발언 수위는 한층 더 높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기자단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기업 규제 수준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보다 높은데도, 국회가 이를 수수방관하고 있다”고 직격했다.

 정세균 국회의장도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과 새 시대를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할 때”라며 여야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지만 여야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정부와 적극적으로 보조를 맞추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규제 문제와 관련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는 3일 본지 기자와 만나 “무분별하게, 급하게 (규제완화를) 하면 안 된다”며 “제천 화재도 무분별하게 그렇게 (규제완화)해서 사고가 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야의 더 큰 모순은 서로 자신이 발의한 법안은 “필요한 법안”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상대방이 발의한 법안에는 소극적이라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2월 지역 단위로 규제를 과감하게 풀어주는 규제 프리존(free zone)을 지정하겠다고 발표했고,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은 ‘규제프리존특별법안’을 발의했다. 19대 국회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된 이 법안은 20대 국회에서 재차 발의됐지만 첫 발의 3년 가까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공공성이 훼손되고, 특정 재벌에 특혜를 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은 찬성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차 국민경제자문회의 겸 경제 관계장관 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차 국민경제자문회의 겸 경제 관계장관 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규제 샌드박스 도입 논의는 문 대통령이 불을 댕겼다. 4차산업혁명위원회 출범식이 열린 지난해 10월 “창업과 신산업 창출이 이어지는 혁신생태계를 조성하겠다”며 직접 규제 샌드박스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후 정보통신기술 분야에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는 내용의 정보통신융합법 개정안도 발의됐다. 하지만 한국당은 “경제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법안이라면 규제 프리존이든 규제 샌드박스든 협조할 용의가 있다”면서도 “규제 프리존에는 반대하면서 규제 샌드박스는 추진하는 민주당의 이분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함진규 정책위의장)는 입장이다.

야권에선 청와대의 접근법을 문제삼고 있다. 지난해 정기국회 때 규제프리존특별법안을 처리하기 위한 여야 협상이 진전을 보였지만 지난해 11월 비공개로 열린 당·정·청 회의에서 청와대가 법안 처리에 난색을 보여 협상이 가로막혔다는 것이다. 당시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규제프리존특별법에 긍정적 입장을 밝혔지만 당·정·청 비공개 회의에서 ‘재벌 특혜가 우려된다’며 청와대의 반대 의견이 나왔다”고 밝혔다.

2월 임시국회가 열리더라도 규제 관련 법안의 처리는 불투명하다. 여야 모두 입장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는 “규제 샌드박스에 대해선 우리 당 차원에서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1962년 이래 역대 네 번째로 ‘대통령 없는’ 신년 인사회를 3일 개최한 경제계에선 또 다시 정치권을 향한 읍소가 나왔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임에도 많은 과제들이 ‘이해관계’라는 허들(장애물)에 막혀 있어 안타깝다”며 “기업들이 많은 일들을 새롭게 벌일 수 있게 제도와 정책을 설계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허진ㆍ하준호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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