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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한국」의 중흥 다졌다"|「경호역전」과 함께 18년…최희우씨의 회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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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필자 최희우씨는 경호역전 18년을 한해도 거르기 않고 지켜본 산 증인이다. 50년대 말 전남지역 중장거리 부문의 간판스타였던 최씨는 71년 제1회 대회 때 전남 팀 총무이사로 참가, 경호와 인연을 맺어 9회 대회부터는 대회 핵심부서인 기록·계시심판을 역임했으며 올해는 대회 총 지휘격인 심판장을 맡게됐다. 현재 대한육상경기연맹 경기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편집자주>
학생마라톤의 최대 이벤트인 경호역전이 올해로 열 여덟 해의 나이테를 아로새기는 동안 한국마라톤의 발전에 끼친 직·간접적인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역전경주란 엄격한 의미에서 마라톤은 아니며 시즌오픈을 앞두고 선수들의 강인한 체력을 다듬기 위한 훈련에 보다 큰 뜻을 둔 농축된 크로스컨트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대회가 수일동안 계속되므로 선수들은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에 시달리기도 하고 도회지의 번잡한 거리나 험난한 자갈길, 또는 숨가쁜 고갯길을 넘게되어 가장 내용이 풍부한 종합훈련을 단시일 내에 수행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호역전은 마라톤 경기력 향상에 필수 불가결한 크로스컨트리를 매년 학생건각들에게 제공함으로써 한국마라톤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특히 한국마라톤이 침체를 거듭하던 70년대 초반 마라톤 새싹들이 국토의 동맥을 따라 종주함으로써 수백만 연도주민에게 마라톤의 정신을 새삼 일깨우는 한편 한국육상의 도약을 염원하는 패기와 집념에 찬 새싹들의 궐기였었다.
또 경호역전대회가 갖는 특별한 의미는 자라나는 묘목들인 중·고교 재학생들만이 출전한다는데 있다. 따라서 경호대회는 마라톤 시·도 대항전이라는 단순한 경쟁장의 차원을 넘어 한국마라톤의 중흥을 기약하는 요람으로서 그 진정한 가치와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경호역전은 호남지역을 비롯, 불모지였던 충청지방까지 선수 저변층을 확대하고 수준을 끌어올림으로써 동고서저로 대변되던 육상의 지역간 불균형 해소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17년의 연륜을 쌓는 동안 한국마라톤의 최고기록 보유자였던 문흥주(문흥주)를 비롯, 김양곤(김양곤) 김종윤(김종윤) 채홍락(채홍락) 이홍렬(이홍렬) 최경덕(최경덕) 정만화(정만화) 최진혁(최진혁) 이상근(이상근) 이춘근(이춘근) 등 한국마라톤의 주역들이 모두 이 대회를 통해 배출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경호역전은 또 1천3백리의 대장정에 단 몇 초 차로 승부가 판가름나는 숨막히는 드라마를 연출, 영원히 기억될 명승부전으로도 유명하다.
간발의 차로 종합우승을 판가름 낸 것은 79년 제9회 대회 때의 단 5초 차.
경북·충남·경기의 3파전으로 시종일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이 대회에서 경북은 28시간 7분44초로 3연패에 도전한 경기를 5초 차로 저지, 감격의 우승을 차지해 환희와 통탄이 엇갈렸었다.
대망의 종착지 서울 운동장을 11.65㎞ 남기고 3초 고수와 추격의 숨막히는 레이스를 연출한 73년 제3회 대회 때 충남과 서울의 접전도 명승부의 하나. 종합기록에서 3초를 앞서던 충남은 마지막 소구간에서 서울과 물고 물리는 접전을 벌인 끝에 결국 7초 차로 앞서 첫 패권을 안았다.
4일간 1분 이내로 선두가 네 번이나 뒤바뀐 76년의 제6회 대회 때 충남·경기의 선두쟁탈전은 희비가 교차된 대역전의 파노라마였고, 대회 첫 3연패를 눈앞에 둔 전북이 단 2명주자의 실수로 막판에 경기에 추월을 허용한 87년 17회 대회 또한 팀 관계자들은 물론 심판·운영요원들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 멋진 승부였다.
이와 함께 경호역전은 싱싱한 학생 준족들의 열띤 대결 속에 해를 거듭할수록 놀라운 기록향상을 이룩해냈다.
먼지 나는 황토길과 자동차도 헉헉대는 비포장 고갯길을 달려온 지 어언 17년.
폐허를 일구어 옥토를 이룩한다는 신념으로 갖은 역경과·악조건을 극복해온 경호역전은 한국마라톤이 세계를 제패하는 그날까지 마라톤 중흥의 선구자적 역할을 떠맡아 올해도 숭고한 성전의 기치를 다시 치켜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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