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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기 “서민·소비자 보호하는 게 금융의 전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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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26일 여의도 집무실에서 퇴임을 앞둔 소회를 밝히고 있다. [사진 금투협]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26일 여의도 집무실에서 퇴임을 앞둔 소회를 밝히고 있다. [사진 금투협]

“새 정부 들어 금융정책은 소비자 보호와 서민 보호 두 가지 외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합니다. 금융이 그게 다는 아닙니다.”

퇴임 앞둔 금투협회장의 쓴소리 #정부가 모든 것을 다하기 보다는 #시장의 힘을 믿어야 금융 발전 #지주사 회장은 연임이면 족해 #혁신위, 노동이사제 도입 등 권고 #금융산업 모르고 하는 얘기들

최근 “정부와 결이 다르다”며 연임에 도전하지 않기로 한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이 26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발언의 배경과 소회를 밝혔다. 황 회장은 1975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삼성자산운용 사장과 삼성증권 사장을 거쳤다. 삼성을 떠난 뒤에는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KB금융지주 회장을 지내는 등 은행권에도 몸을 담았다.

황 회장은 많은 해석을 낳았던 ‘결이 다르다’는 표현은 그간 누적된 느낌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것이 초대형 투자은행(IB)을 포함한 종합금융투자사업자의 신용공여 확대다. 연초 신용공여 한도를 자기자본의 100%에서 200%로 늘리는 안이 국회 법안 소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정무위원회 일부 의원의 반대로 무산됐다. 결국 늘어난 100%는 중소·혁신기업에만 쓰도록 용처를 제한한 안이 이달 정무위를 통과했다. 황 회장은 “대기업도 충분히 자금난을 겪을 수 있는데 시장주의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서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금융위원회 민간 자문기구인 금융행정혁신위원회(혁신위)에 대해선 ‘공약실천 금융 전위대’에 가깝다며 혹평을 쏟아냈다. 혁신위는 최근 금융회사의 노동이사제 도입, 인터넷전문은행 은산분리 완화 반대, 초대형 IB 규제 등을 담은 최종 권고안을 내놨다. 황 회장은 “혁신위가 추진하는 대여섯 가지 과제 중 동의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며 “금융산업 발전에 애정이 있다면 할 수 없는 얘기들”이라고 비판했다. 연임 도전 포기가 금융당국의 압박 때문이란 추측에 대해선 “오비이락”이라고 선을 그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대기업 그룹에 속한 회원사 출신이 협회장에 선임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언급한 게 배경이다. 이에 대해 황 회장은 “오래전부터 불출마 의사를 밝히려 했고 그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20년 금융 현장에서 뛴 소회는 ‘회한’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오랜 수감생활 끝에 가석방됐는데도 자유가 익숙지 않아 허락 없이 화장실에 못 가는 레드(모건 프리먼 분)에 금융업을 비유했다. 황 회장은 “지난 20년 동안 정부는 금융업에 대해서 ‘큰 정부’를 넘어 ‘모든 것을 하는(do everything) 정부’였다”며 “금융업이 이런 규제 틀 안에서 계속 간다면 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금융권에선 유독 사건·사고가 많았다.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과 저축은행 영업정지 사태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황 회장은 “시장의 힘을 믿고 원칙을 중심으로 규제하되 시장이 실수하면 스스로 그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관치”라며 “시장 실패와 그에 따른 구조조정으로 위험을 통제할 체력을 길러야 앞으로 30년 금융이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지주사 지배구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황 회장은 특정인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하면서 “최종 인사권자인 금융지주사 회장이 되면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막강한 힘이 생기는데 주위에서 치켜세우다 보면 나태해질 우려가 있다”며 “3년씩 2연임이 족하다”고 말했다. 조직이 1인 중심으로 굴러가면 문화가 지나치게 경직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너무 오래 (회장직을) 하다 보면 조직을 자기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이를 경계해야 한다”며 “6년이면 상당히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이라고 덧붙였다.

국민연금이 내년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가 수탁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연금 사회주의 우려가 불거진 데 대해선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델로 삼을 만한 곳으로 일본 국민연금기금(GPIF)을 꼽았다. GPIF는 보유한 주식 의결권을 100% 운용사에 위탁하고 있다. 황 회장은 “정치에 대한 사회적인 신뢰가 낮은 일본에서는 GPIF가 주식 의결권을 시장에 맡긴다. 의결권이 있으면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담이 크다. 의결권을 시장에 맡기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같은 사태에서 국민연금이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2월 퇴임 후 계획을 묻는 말에 그는 “글을 쓰거나 후학을 양성하고 싶다”며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마음이 설렌다”고 답했다. 그러나 “정치에는 능력도 관심도 없다”고 덧붙였다.

◆황영기

1952년 경북 영덕 출생으로 75년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이후 뱅커스트러스트 인터내셔널 도쿄지점을 거쳐 삼성자산운용 사장과 삼성증권 사장을 지냈다. 이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KB금융지주 회장, 차병원그룹 부회장을 역임했다. 2015년 2월부터 금융투자협회 회장을 맡았다.

이새누리 기자 newwor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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