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급발진 의심 사고 낸 운전자 면허정지는 부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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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발진 의심 사고. 사진은 이 기사와 관계없음. [연합뉴스]

급발진 의심 사고. 사진은 이 기사와 관계없음. [연합뉴스]

급발진이 의심되는 사고를 낸 운전자의 면허를 정지시키는 건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8단독 한지형 판사는 '급발진이 아니다'는 국과수의 판단에도 "급발진 현상에 의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고 25일 밝혔다.

세차 마친 뒤 급가속한 차량…8명 다쳐 #차량 검사한 국과수 '급발진 아니다' 판단했지만 #법원 "급발진으로 볼 여지 있다" 면허정지 취소

권 모 씨는 지난해 10월 서울 시내의 한 주유소에 딸린 자동 세차장에서 자신의 SUV 차량을 세차했다. 세차를 마치고 출발하려는 순간 차량이 급가속 됐다. 차량은 갑작스럽게 편도 4차로 도로를 횡단해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의 한 건물 외벽을 들이받고 나서야 멈췄다. 이 과정에서 지나던 차량 두 대를 들이받았고 연쇄 추돌 사고가 발생하면서 모두 8명이 다쳤다.

권 씨는 종합보험에 가입돼 있어 형사처분은 받지 않았고 민사 소송도 제기된 것이 없었지만, 면허정지 처분을 받았다. 서울 마포경찰서는 "도로교통법상 안전운전 의무를 위반해 인적 피해를 발생시켰다"며 벌점 60점을 줘 60일간 권 씨의 면허를 정지시켰다.

권 씨는 사고 원인이 차량 급발진이라고 확신했다. 차량 내부 블랙박스와 주유소 CCTV 영상에는 엔진음이 갑자기 커지면서 차가 출발했고 권 씨와 배우자가 "왜 이러느냐"며 소리치는 상황 등 급발진 정황이 그대로 담겼다.

미국에 거주하는 배우 겸 사업가 손지창(47)씨가 지난해 9월 "급발진 의심 사고가 났다"며 게재한 사진. [손지창씨 페이스북]

미국에 거주하는 배우 겸 사업가 손지창(47)씨가 지난해 9월 "급발진 의심 사고가 났다"며 게재한 사진. [손지창씨 페이스북]

권 씨는 면허정지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심판을 청구했지만 기각당했다. 사고 원인을 조사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급발진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차량을 살펴본 결과 브레이크 시스템에 문제가 없고, 주유소 CCTV 영상 속에 보이는 차량의 브레이크 등이 꺼져 있는 등 권씨가 급발진 차량을 멈추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런 판단을 수긍할 수 없었던 권 씨는 면허정지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냈고 법원은 권 씨의 손을 들어줬다. 권 씨에게 내린 면허정지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한 판사는 "국과수가 인정한 사실만으로 권 씨의 고의나 과실에 의해 일어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면서 "차량이 갑자기 가속돼 도로에 진입한 것은 이른바 급발진 현상에 의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고, 권 씨에게 정신적인 장애가 있다고 볼 자료도 없는 만큼 면허정지 처분은 위법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2015년 2월에도 서울의 한 주유소 세차장에서 자동세차를 마친 운전자가 급발진 의심 사고를 내 주유소 직원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사고를 낸 운전자 송 모 씨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서울중앙지법은 급발진 가능성을 인정해 지난해 4월 송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같은 해 12월 항소심 재판부는 "사후검사 결과 사고 차량에 기계적·기능적 고장은 발견되지 않았다"며 송 씨에게 금고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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