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아탈리 칼럼

안 할 줄도 아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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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자크 아탈리 아탈리 에 아소시에 대표 플래닛 파이낸스 회장

자크 아탈리 아탈리 에 아소시에 대표 플래닛 파이낸스 회장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저작을 남긴 작가 장 도르메송이 지난 5일 세상을 떠났다. 수년 전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물었다. 나이 들면서 새로 배운 것 가운데 가장 값지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특유의 짓궂은 미소와 함께 돌아온 답은 이랬다. “나이 먹어서야 비로소 배운 것 중 가장 쓸 만한 것이라면, 뭔가를 안 할 줄도 알게 된 거죠.”

최근 별세한 프랑스 철학자 #나이 들어 배운 최고의 것 #‘안 할 줄 알게 된 것’ 꼽아 #책임 외면과 자기기만 없이 #의지 따라 거절할 수 있어야

당시 그 대답이 부잣집 응석받이만이 할 수 있는 얘기처럼 들렸다. 거절한다는 일조차 힘에 부칠 정도로 날 때부터 호의에만 둘러싸여 살아온 평생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그런 대답을 내놓았던 그의 머릿속에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출판사의 책 출간 제의, 신문사 편집장들의 기고 제안, 대학들의 학회 참여 요청, ‘숭배자’들의 오찬이나 만찬 초대가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그가 남들에 비해 넘치는 운을 타고났던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다복했던 이도 드물다. 출생 신분과 재능을 보면 그 역시 자신에게 집중된 행운에 대해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글라데시 산간벽촌의 농부가 아닌 장 도르메송으로 태어남을 날마다 하늘에 감사했다. 시골의 농부로 태어났더라면, 안 하겠다는 말은 꺼내기조차 어려웠을 테다. 일단 거절 자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람들조차 거의 없다시피 했을 테니까 말이다.

요즘 세상에서 살다 보면 거부할 수 없는 지시를 받거나 내키지 않아도 뿌리칠 수 없는 일자리를 만나는 일이 누구에게나 왕왕 벌어진다. 거절하기 어려운 까닭이라면야 법적 강제가 따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뭔가를 안 하겠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물질적 여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여기서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은 미래를 향해 열린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리는 것이요, 내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뭔가 다른 제안을 또 받을 수 있다는 뾰족한 수도 없건만 당장 내게 들어온 선물을 거절하는 것이나 같다.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은 적(敵)을 만드는 일이고, 고객이나 파트너 또는 일자리를 잃게 될 위험을 감수하는 일과 다름없다.

그렇지만 장 도르메송의 말은 새겨들어 볼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안 할 줄도 알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겠다는 용기를 뜻한다. 식사나 약속, 이성 교제, 구직이나 구매, 상사의 지시 등 다른 사람의 욕망에 어쩔 수 없이 휩쓸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안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에서는 늘 비범한 영웅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는 표시다. 아이가 안 하겠다고 하는 것도 어른이 그의 자유의지에서 내리는 결정과 다르지 않다.

아탈리 칼럼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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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할 줄도 알게 된다는 것은 선택의 윤리를 세우게 한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게 한다. 안 할 줄도 알게 된다는 것은 책임을 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어쩌면’이라 말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중에’ ‘좀 더 지켜보자’ ‘괜찮을 것도 같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는 말도 포함된다.

결국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기기만을 그만두며, 두려움을 버릴 줄 알게 한다.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버리고 내 거절의 본뜻, 즉 내가 맡아서 할 수 있는 일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일을 사이에 두고 피어나는 의혹을 방치하지 않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어쩌면’이라는 말은 들릴 일조차 없게 하겠다는 것이다. ‘어쩌면’이 양산해 내는 그 모든 오해와 폭주(暴走)를 떠올려 보라. 불분명함을 숙주로 삼아 배를 불리는 그 모든 가증할 행위를 생각해 보라.

‘안 할 줄도 알게 되는 것’은 ‘잘할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자신이 되는 길의 시작이다. ‘안 할 줄도 알게 되는 것’에는 ‘알다’란 말이 들어 있다. 이 말은 당신 입장에서는 원하지 않지만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당신 마음에 들 것이란 생각으로 제안한 일을 얼굴 붉히는 일 없이, 누구를 망신 주지 않으면서도 거절하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과 같다. 거절당하는 입장에 있는 이의 수긍과 합의, 양해를 이끌어 낼 길을 찾는 것이다.

안 하겠다고 말하는 일은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다른 사람과 진정한 관계를 수립하는 기회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장 도르메송의 말이 옳다면, 안 할 줄도 알게 된다는 것은 결국 ‘해 보겠다’는 대답이 주는 선물의 가치를 훨씬 더 높여 주는 최상의 태도라고 하겠다.

자크 아탈리 아탈리 에 아소시에 대표·플래닛 파이낸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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