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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스승’ 강세황 가문 5대, 초상화로 한자리 모였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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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강세황의 부친인 강현(1650~1733) 초상화.

강세황의 부친인 강현(1650~1733) 초상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김동현 차장은 지난 10월 초 미국의 한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 올라온 초상화 한 점을 주목했다. 작품 오른쪽 여백에 적힌 ‘강판부사정은 기사생칠십일세을묘구월진상(姜判府事貞隱 己巳生七十一歲乙卯九月眞像)’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판부사’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의 준말로, 조선시대 고급 관리들이 모인 중추부의 종1품 관직을 말한다. ‘정은’은 조선 말기 문신 강노(1809~1886)의 호다. 1879년 강노의 나이 71세 때 9월에 그린 초상화란 뜻이다.

경매 나온 강세황 증손 강노 초상 #국외소재문화재재단서 ‘물건’ 직감 #미국 경매서 3억4000만원에 매입 #아들 강인 초상도 올 국내경매 나와 #초상화 계보 5대로 확장 진기록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서 동시 공개

김 차장은 단박에 ‘물건’임을 직감했다. 강노는 조선 후기 문인화가 표암(豹菴) 강세황(1713~1791)의 증손자다. 표암을 중심으로 4대에 걸친 강씨 집안 초상화가 내려오던 터라 강노 초상까지 더하면 5대를 잇는 사대부 집안의 초상화 계보를 찾는 진기록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조선 대표 문인화가 강세황(1713~1791) .

조선 대표 문인화가 강세황(1713~1791) .

외국에 있는 우리 문화재 연구·환수기관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세 차례 평가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10월 말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시에 있는 에버러드 경매소로 날아갔다. 경매 현장에서 초상화를 확인하고 31만 달러(약 3억4000만원)에 사들였다. 미국을 다녀온 조선미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5대에 걸친 한 집안의 직계 초상화를 확인한 건 처음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5부작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강세황의 아들인 강인(1729~1791) .

강세황의 아들인 강인(1729~1791) .

한국에 돌아온 강노 초상이 19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개됐다. 현재 중앙박물관에 있는 그의 4대 조상들 초상화 사진과 함께다. 세 세기에 걸친 한 집안 초상화가 동시에 소개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강세황·강노는 진주 강씨 은열공파(殷列公派)다. 고려 현종 때 공신인 강민첨(963~1021)이 시조로, 강민첨의 초상화 역시 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풍속화가 김홍도의 스승으로 유명한 강세황 집안은 조선 명문가다. 할아버지 강백년(1603~1681), 아버지 강현(1650~1733)에 이어 강세황까지 3대 연속 기로소(耆老所·정2품, 70세 이상 문신을 예우하기 위한 기관. 요즘으로 치면 예술원이나 학술원)에 들어간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예를 누렸다. 병조판서·좌의정까지 지낸 강노 역시 나중에 기로서에 들어갔다.

강세황의 손자인 강이오(1788~1857) .

강세황의 손자인 강이오(1788~1857) .

이번 초상화는 문화사적 의미가 크다. 강현과 강세황, 강세황의 손자인 강이오(1788~1857)의 초상화 모두 각각 보물 제589호, 제590호, 제1458호로 지정됐다. 강세황의 아들 강인(1729~1791)의 초상화는 지난 9월 서울 옥션경매에 나왔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3억5000만원에 구입했다. 올해에만 4대, 5대 계보가 이어진 것이다.

미국 서 구입한 강세황의 증손자 강노(1809~1886).

미국 서 구입한 강세황의 증손자 강노(1809~1886).

초상화는 조선시대를 상징하는 미술품이다. 임금이나 사대부 얼굴의 반점·주름수염 등 외모를 낱낱이 그려 내는 동시에 해당 인물의 성품·기질 등 내면을 드러냈다. 전문용어로 전신사의(傳神寫意)라고 한다. 강노의 초상 역시 71세 노인의 피부, 수염, 마마 자국, 사마귀 등이 정밀화처럼 묘사됐고 굳게 다문 입술 등 선비의 완고한 기품이 잘 표현돼 있다. 기존의 4대 초상화가 비단에 그린 반면 강인의 초상은 얇은 한지로 제작됐다.

김울림 중앙박물관 학예관은 “강노 초상화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출처가 분명한 수작이다. 그림 뒷면에 바탕색을 칠해 작품의 은은한 효과를 돋우는 조선시대 배채법(背彩法)을 확인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수묵화가 김호석씨도 “눈·코·입·귀 등 얼굴 전체를 핍진(逼眞)하게 담은 뛰어난 작품이다. 강직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한 선비의 정신세계를 담았다”고 말했다.

강노 초상이 미국에 건너간 경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가톨릭 교회가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던 것을 서배너시에 사는 미국의 한 개인이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중앙박물관은 내년 8월께 진주 강씨 초상화 전체를 모은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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