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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협력기금에 깜깜이 예산 2480억원 … 대북 ‘퍼주기’ 꿈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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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 예산에는 대통령의 통치철학과 정권의 지향점이 녹아 있다. 돈을 어느 곳에 어떻게 쓰는지 살펴보면 정책노선이 드러난다. 북한과의 교류·지원에 방점을 둔 문재인 정부는 어떨까. 대북정책 추진에 필요한 자금을 쟁여 두는 ‘곳간’ 격인 남북협력기금이 바로미터다. 기금 문제를 집중 분석해 온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정양석(자유한국당) 의원실을 찾아 정부 대북예산을 심층 분석해 봤다.

북 철도 보수에 백두산 관광 지원 #“10·4 선언 부담 떠안기” 지적도 #통일부, “실행에 14조원 든다” #김정은이 합의 사실상 뒤엎어 #국회 견제 없는 주먹구구 집행 #18명 심의위원 중 민간 3명뿐

통일·대북 현안과 관련된 정부의 돈주머니는 크게 두 개로 나뉜다. 통일부의 일반회계 예산과 남북협력기금이다. 탈북자 정착 지원과 통일교육, 대북 정보분석 등에 쓰일 내년 예산은 2275억원 규모. 그런데 남북경협이나 대북지원에 쓸 돈을 비축해 둔 협력기금은 4배가 넘는 9624억원에 이른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다. 통일부는 당초 지난해보다 835억원 증액(8.7%)한 1조462억원을 요청했지만, 국회 심의 과정에서 838억원이 삭감됐다. 잇따른 핵·미사일 도발에다 심의가 임박한 11월 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까지 쏘아 올리는 바람에 일부 항목이 줄어든 것이다. 협력기금 1조원 돌파라는 상징성을 겨냥했던 통일부의 뜻도 꺾여 버렸다.

유리지갑 같은 예산 내역과 달리 남북협력기금은 상당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대북협상 등을 고려해 구체적 항목은 공개하기 어렵다는 게 통일부의 입장이다. 고위 당국자는 “대북협상 때 북한이 마치 자기들 예산 항목 하나를 남측에서 조달하려는 모습까지 보인다”고 귀띔했다. 예산 부처나 외통위 소속 의원실에도 개략적 내용을 열람 또는 대면보고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2018년 협력기금도 마찬가지다. 연례적으로 책정해 두는 식량·비료 지원 등의 항목 외에 대부분은 몇 개의 큰 사업명으로 뭉뚱그려 놓았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내년 협력기금 예산 내역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기타 경협사업(비공개)’이란 대목이다. 총 2480억원이 책정돼 있지만 세목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꼼꼼히 들여다보니 지난해 없던 ‘관광협력’ 관련 14억원이 신설된 게 확인된다. 금강산 관광 9억원과 백두산 관광 5억원이 각각 잡혀 있다. 어떤 식으로든 내년 금강산 관광 재개와 백두산 관광 착수를 추진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뜻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북한 기술인력 양성 항목에 배당된 43억원은 비판 소지가 커 보인다. 군사 전용이 가능한 컴퓨터·정보기술(IT) 분야 등의 영재와 전문가를 우리 돈으로 키워 주는 교육이란 점에서다. 유엔과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따른 대북제재 논의 과정에서 북한 유학생에 대한 특정 분야 기술교육을 금지하는 등 비판 분위기로 돌아섰다. 지난 4월부터 계속된 네 차례의 국내 암호화폐(일명 가상화폐) 거래소의 해킹 공격이 북한 소행이란 게 최근 국가정보원에 의해 드러나기도 했다. 국제사회와의 대북 공조 차원에서 이미 잡힌 예산이라도 전액 삭감하는 게 맞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건 ‘남북 경협 시설 기반 구축’ 항목이다. 올해보다 무려 1009억원이나 증액한 1640억원으로 늘렸다는 점에서다. 통일부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 한반도 정책의 핵심인 ‘신(新)경제지도’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예산”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신경제지도는 남북한이 하나의 시장이라는 경제공동체를 구현하고, 주변국과의 경제벨트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에 평화·번영의 새 경제질서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과 달리 실제는 북한의 노후한 철도·도로 등 인프라를 개·보수해 주는 쪽에 치우쳐 있다. 평양~신의주 철도 개·보수에 595억원을 비롯해 개성~평양 철도 개·보수 462억원,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20억원 등 1077억원이 철도·도로에 배당됐다.

이쯤 되니 퍼뜩 떠오르는 게 생겼다. 2007년 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10·4 선언이다. 8개 항의 합의문에는 ‘남북경협을 위한 기반시설 확충’을 내세워 대북 인프라 지원 항목이 빼곡하게 담겼다. 여기에는 내년 협력기금에 잡혀 있는 ‘개성~신의주 철도’(평양 경유)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문제가 핵심 사업이다. 백두산 관광 실시와 직항로 개설 등도 포함됐다.

노무현 정부 임기 몇 달을 남기고 합의한 10·4 선언은 천문학적 국민 부담을 후임 정부에 떠안겼다는 비판을 받았다. 통일부는 10·4 선언 이행에 필요한 40여 개 항목의 지원에 모두 14조3000억원의 국민 세금이 들어간다는 ‘소요 재원 추계’를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개성~신의주 철도·도로 개·보수 등 사회간접자본(SOC) 지원에 8조6700억원, 개성공단 2단계 사업에 3조3000억원 등이다. 정양석 의원실의 김수철 보좌관은 “문재인 정부가 결국 10·4 선언 이행을 위해 협력기금에 ‘깜깜이’ 항목을 배정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남북협력기금의 집행 의결이 주먹구구 식으로 이뤄지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1990년 8월 만들어진 이 기금은 매년 1조원 안팎으로 편성된다. 김대중 정부 1조8564억원, 노무현 정부 3조1081억, 이명박 정부 5296억원, 박근혜 정부 9683억원을 쓰는 등 집행 규모가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최근 3년간 집행 의결기구인 남북교류협력추진위(위원장 통일부 장관)는 16차례 회의 중 2차례만 대면심의(230억7500만원 규모)를 했고 나머지 14회는 서면심의(5781억원)로 처리했다. 50개 안건 가운데 수정이나 보류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개선 방안은 없을까. 우선 1조원 가까운 예산을 다루는 만큼 주요 집행 결정 시 국회 보고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8명의 교추협 위원(정부 차관급이 12명) 가운데 민간 위원이 3명에 불과한 점도 문제다. 남북교류협력법 개정안을 발의한 정양석 의원은 “협상력 제고를 이유로 비공개하는 것은 남북관계를 정권 차원에서 독점하려는 폐쇄주의적 정책의 산물”이라며 “여타 기금운용심의기구처럼 민간위원을 적어도 절반 이상 위촉하는 등 기금 집행이 투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 대화 재개를 통한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위기 타개를 표방한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 선수단이 참가하는 게 그 돌파구가 될 것이라며 공을 들이고 있다. 10·4 선언 이행 채비도 서두른다. 하지만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아버지이자 선대(先代) 수령인 김정일이 10·4 선언에 서명한 핵 문제 해결과 남북 신뢰를 걷어차 버렸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남북 응원단이 경의선 열차를 타고 함께 가자’는 선언문 제6항의 약속도 공수표로 만들었다. 정부가 국민 혈세로 대북 ‘짝사랑’에 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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