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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리, 늦게 배운 골프 때문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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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총리가 된 후 골프 구설만도 이번이 여섯 번째다. 2004년 한 차례(군부대 오발사고 희생자 조문 직전 골프), 2005년 세 차례(속초 산불.남부지방 집중호우 때 골프, 봉황문양 골프공 선물), 2006년 두 차례(브로커 윤상림과의 관계, 철도파업 첫날 골프) 등. 이 정도면 운명 수준이다.

이 총리가 골프와 첫 인연을 맺은 건 1997년. 동교동계 특무상사로 불린 이훈평 전 의원이 중매자였다.

"한보 비리 사건으로 구속된 권노갑 의원을 함께 면회하고 돌아오던 중 골프 얘기가 나왔다. 이 총리는 '친구가 사준 골프채를 6개월째 차 뒤트렁크에 넣어만 두고 있다'고 해 '3선의원도 됐으니 골프를 알아야 한다'며 국회 주변 S연습장에 등록시켜줬다."(이 전 의원).

그 뒤 이 전 의원은 뉴서울골프장으로 데려가 이 총리의 머리를 올려줬다(골프장에 처음 데려가는 것을 이렇게 표현함).

이 전 의원은 5일 "그날 첫 타석에서 이 총리가 세 번 만에 공을 맞힌 모습이 눈에 선한데 막상 골프 때문에 이렇게 되고 보니 괜히 내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 이 총리와 골프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권노갑.김영배.안동선 전 의원이다. 나이 45세 때 늦깎이로 배운 골프에 재미를 붙이도록 해준 사람들이다. 이 총리는 당시 동교동계 원로인 이들과 내기 골프를 하며 골프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승부욕이 강한 이 총리는 주로 따는 편이었다고 한다. 열린우리당 한 중진의원은 "골프장에서 권 전 의원 등이 이 총리와 점수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면 나이를 초월한 친구 같았다"고도 했다. 그래선지 서울대 동기(72학번)인 정동영 의원이 2000년 12월 권 최고위원의 사퇴를 요구하며 정풍운동을 벌일 때 이 총리는 가담하지 않았다.

이후 이 총리의 골프 사랑은 도를 더한다. 2001년 3월 민주당 정책위의장 통보를 받은 곳도 골프장이었다. 2004년 6월 노무현 대통령에게 총리 제의를 받는 자리에서 "앞으로 골프를 못 치게 됐다"는 농을 했다. 두 달 후 노 대통령은 이 총리와 라운드했다.

악연만 있는 건 아니다. 노무현 정부 출범 후 별 직책 없이 지내던 이 총리는 총리로 임명되기 전 평생에 한 번 하기 어렵다는 홀인원을 했다. 새벽 안개 속에서 친 공이 그린에 올라가 보니 홀 안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홀인원 보험으로 동반자들을 대접하며 "홀인원을 하면 3년간 재수가 좋다는데"라고 말한 그는 이후 2004년 6월 총리가 됐다.

이 총리의 골프 실력은 주말골퍼로서는 수준급인 80대 초중반. 총리가 된 뒤에는 실력이 줄었다고 한다.

국무총리의 골프 구설 원조는 김종필(JP) 전 총리다. JP는 총리 시절 "내가 하는 유일한 운동이 골프인데 내 건강을 대신 책임질 수 있느냐"며 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외국 순방 중에도 골프장을 찾았다.

그래선지 이 총리에 대해 동정적인 여론이 없는 건 아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골프가 아니라 테니스를 했다면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라크 공습 때 회의만 끝나면 골프를 치러갔지만 미국 언론들은 대통령의 취미활동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이번 건은 정상 참작의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대부분이다. 천재지변인 산불이나 수해와 달리 철도 파업은 사전에 예고됐기 때문이다. 총리가 골프를 치던 3.1절에 노동부.건교부와 경찰은 파업 첫날을 맞아 비상 근무를 했다. 같이 친 사람들 중 문제 있는 인사들이 포함됐다는 점도 심각한 부담이다. 이 총리는 지금 골프 때문에 낙마하는 첫 총리가 될 위기에 처해 있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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