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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단체협약 현대화’로 경쟁력 끌어올린 스페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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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 현대차지부 교섭위원들이 단체교섭이 재개된 10월 31일 교섭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금속노조]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교섭위원들이 단체교섭이 재개된 10월 31일 교섭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금속노조]

영국 정부가 발간한 ‘국가별 자동차산업 국제경쟁력 비교’ 보고서에서 노동시장 경쟁력 8위를 기록한 스페인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보고서에 한국은 25개국 중 24위로 최하위권이었다. <중앙일보 8일 자 종합 1면 참고>

대규모 파업으로 공장 폐쇄 사태 터진 스페인 #단체협약 현대화 이후 노동경쟁력 끌어올려 #단체협약 통한 노조 경영 참여 문화 바꿔야 #

스페인은 절대 순위가 높진 않지만 주목할 만한 국가다. 1980년~1996년 사회당이 장기집권한 스페인은 불과 10여년 전까지 노동시장이 경직된 국가로 유명했다. 전통적으로 오후 2시~4시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siesta) 문화 등의 영향으로 유럽 주요 자동차 생산 국가 중 생산성이 낮은 편이었다.

2009년 사달이 났다. 스페인 바야돌리드 소재 르노자동차 스페인 공장에서 대량 해고 사태가 벌어졌다. 이 공장은 르노삼성차가 한국에서 판매하는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QM3와 전기차 트위지 등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현대차 울산1공장 코나 생산라인. [사진 현대차]

현대차 울산1공장 코나 생산라인. [사진 현대차]

2002년까지 연평균 29만대를 생산하던 이 공장은 2008년 생산량이 3분의 1 이하로 추락했다. 일감이 줄자 사측은 1일 3교대로 근무하던 근로자들에게 1일 1교대를 제안한다. 2250명의 노동자는 이를 거부했다. 고용 보장을 요구하며 일제히 파업했다. 세계 자동차 역사에 남을만한 대형 파업이 벌어지자 사측도 가만있지 않았다. 당시 해고자만 2000명을 넘어섰다.

당시 스페인 상황을 지금 한국이 따라가는 모양새다. 지난 5~8일 부문별로 2~3시간씩 부분파업을 진행했던 현대차 노조는 11일부터 15일까지 하루 3~4시간씩 연속 부분파업에 돌입했다. 지난해 6314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한국GM에서도 노조가 공장별로 생산물량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 본사가 글로벌 구조조정을 진행하는데, 한국만 물량 확보 ‘각서’를 쓰라고 요구하고 있다.

노사경쟁력 수준이 한국과 진배없던 스페인은 어떻게 경쟁력을 끌어올렸을까. 다양한 해법 중 하나가 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노사 ‘단체협약 현대화’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임금 및 단체협상(임단협) 교섭 주기가 길어지면 통상 파업이 감소한다”며 “르노자동차 스페인 공장 노사는 2013년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3년으로 늘리고, 이후에도 노사가 합의하면 단체협약 시기를 자율적으로 결정하자는 데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또 회사 경영이 어려울 경우 노조와 협의하지 않고 사측이 단체협약을 일부 변경할 수 있다는 조항도 삽입했다. 임금인상 상한선도 설정했다. 임금인상률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의 50% 이하로 설정하는 대신, 연초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면 지급하는 성과급을 늘렸다. 당시 스페인에서 보기 힘들던 임금과 생산성 연동 구조를 구축한 것이다.

전날 12년만에 전면파업을 한 현대차 노조가 27일 부분파업 돌입해 1조 노조원들이 11시경 명촌정문을 통해 조기 퇴근 하고 있다.부분파업은 오늘은 1조가 오전 10시 5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2조는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 총 8시간 파업에 들어간다. 현대차 노조는 오는 30일까지 부분파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전날 12년만에 전면파업을 한 현대차 노조가 27일 부분파업 돌입해 1조 노조원들이 11시경 명촌정문을 통해 조기 퇴근 하고 있다.부분파업은 오늘은 1조가 오전 10시 5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2조는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 총 8시간 파업에 들어간다. 현대차 노조는 오는 30일까지 부분파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덕분에 이 공장의 글로벌 경쟁력은 향상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올리버와이먼이 지난 10월 발표한 전 세계 자동차 공장 생산성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르노-닛산얼라이언스 소속 18개 공장 중 스페인 르노 바야돌리드공장은 종합 1위(대당 생산시간(HPU)=16.2시간)를 기록했다.

스페인을 벤치마킹해 한국도 단체협약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대자동차는 사업확장ㆍ공장이전 같은 굵직한 계획은 물론이고, 기계 하나를 도입해도 노동조합 허락을 받는다. 현대자동차 단체협약 41조가 ‘신기계ㆍ신기술 도입, 신차종 개발, 작업공정 개선, 인력전환배치 계획을 수립할 때는 즉시 노조에 알리고 노사공동위원회가 심의ㆍ의결한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르노삼성차 노사도 지난 9월 체결한 단체협약에 “고용안정에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노ㆍ사 공동 고용안정위원회를 개최해서 노사가 합의한다”는 내용(고용보장 협약서)을 포함하고 있다. 한국 노동조합 관련법은 단체교섭ㆍ단체협약에 일정한 법률상의 효력을 부여한다.

2012년 2월 금융위기 당시 스페인 사회는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당시 마드리드에서 경찰관들이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시위자를 붙잡아 곤봉으로 내려치고 있다. [마드리드 AP=연합뉴스]

2012년 2월 금융위기 당시 스페인 사회는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당시 마드리드에서 경찰관들이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시위자를 붙잡아 곤봉으로 내려치고 있다. [마드리드 AP=연합뉴스]

유럽에서는 노조가 이처럼 단체협약을 통해 경영에 참여하는 규정은 없다. 경영상 판단에 반대한다고 해서 파업권이 인정되지도 않는다. 대신 노사협의회ㆍ근로자대표제도 등 다른 형태의 경영 참가 시스템이 존재한다.

박지순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동개혁 이후 스페인은 기업의 변화를 야기하는 경영상 의사결정을 종업원대표와 협의한다”며 “다만 종업원대표는 노조와 달리 비정규직ㆍ사무직ㆍ촉탁직 등 전체 근로자를 대표하는 단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또 경영상 판단에 반대한다고 파업하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얘기”라고 지적했다.

문희철 기자, 울산=최은경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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