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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동반자들이 빚은 마술적 소박함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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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호 27면

로스트로포비치와 벤자민 브리튼이 연주한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로스트로포비치와 벤자민 브리튼이 연주한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학교 다닐 때도 서클이라는 곳은 발걸음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 50대에 이르러 음악 카페에 가입했다. 음악은 혼자 듣는 것이지만 취미로서의 오디오는 독학만으로 깨치기 힘들다. 스피커와 앰프 등 기기를 알아야 하고, 음반 레이블과 연주가의 계보를 꿰뚫어야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 모여서 얘기하다 보면 발길 닿는 대로 홀로 걸을 때는 몰랐던 신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오디오 세계도 도처에 유상수(有上手)다.

an die Musik: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모임의 간판은 ‘자유로 하이파이’다. 고양 파주지역 회원들이 중심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모임의 자유로운 기풍도 반영됐다. 회칙이나 회비 같은 게 없고, 들고 나는 것도 한강 하류의 갈매기처럼 자유롭다. 특징은 여성이 없다는 것이다. 금성(Venus)에서 온 그들은 보기와 달리 LP판에 바늘을 가만히 내려놓는 것을 몹시 어려워하고, 앰프와 스피커를 케이블로 연결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지난달 회장 댁에서 정기모임을 했다. 문을 여니 마르첼로 오보협주곡의 아다지오 악장이 고요하게 흘렀다. 사내들만 시커멓게 모여 앉은 공간에 고음 관악기의 탈속한 선율이 맴도는 모습은 자못 기이하게 보인다. 그러나 모두 진지하게 음악을 대한다. 집에서 자주 듣는 곡도 모여서 들으면 다르게 들린다. 두 개의 쇳덩어리 크렐 앰프와 소너스 파베르의 익스트리마 스피커는 맑은 해상도와 넓은 대역으로 옛 녹음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창밖엔 겨울비가 그친 뒤 짙은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가 턴테이블에 올랐다. 모일 때마다 회장이 즐겨 들려주는 로스트로포비치 연주다. 1968년 이 녹음 이래 많은 첼리스트가 같은 곡을 연주했지만 로스트로포비치를 뛰어넘지 못했다. 그의 40대 전성기 시절의 기량이 응축됐기도 했지만, 이 음반은 반주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영국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이 피아노를 맡고 있다.

로스트로포비치와 벤자민은 1960년에 처음 만났다. 그 무렵 벤자민은 작곡가로서, 또 피아니스트로 최고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바흐·베토벤·브람스를 갖지 못한 영국에서 벤자민은 헨리 퍼셀 이래 최대의 작곡가였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아내인 소프라노 갈리나 비시네프스카야, 벤자민의 평생의 동반자인 테너 피터 피어즈도 곧 합류했다. 그들은 1976년 벤자민이 죽을 때까지 한 가족처럼 지냈다.

갈리나는 벤자민을 처음 만난 순간 그의 소박함과 부드러움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얼굴을 쓰다듬고 뺨에 입을 맞출 정도로 스스럼이 없었다. 그것은 모스크바에서 10년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던 쇼스타코비치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갈리나 자서전』, 음악춘추사)

그들이 만났을 때 벤자민은 ‘전쟁 레퀴엠’을 쓰고 있었다. 2차 대전 희생자 추모 음악이었다. 벤자민은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세 나라 가수를 기용하려고 했는데 갈리나의 노래를 듣고는 “바로 당신!”이라고 외쳤다. 나머지 두 사람은 독일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영국 테너 피터 피어즈였다.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음반은 그런 예술적 유대 속에서 탄생했다. 갈리나는 ‘마술적이라고 할 만한 소박함’이라고 표현했다.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만 듣고 음반을 내렸다면 B면도 들어보길 권한다. 프랭크 브릿지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가 실려 있다. 브릿지는 벤자민이 12살 때부터 음악을 가르친 스승이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친구 벤의 스승의 곡을 같이 연주해 음반에 실었다. 그들의 우정이 만져지는 듯하다. 곡은 신비하고 열정적이며 저음 현악기의 매력을 만끽하게 한다.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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