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취재일기] 생색내기 '실업고 방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갑작스러운 의원들의 부탁(?)에 학교들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개학 직후 정신이 없을 때 국회의원의 방문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최고위원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 14명이 지난달 22일 서울공고를 방문했다. 학생과 교사를 직접 만나 고충을 듣고 '실업고 지원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틀 후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 143명 전원에게 불똥이 떨어졌다. 김한길 원내대표가 의원총회에서 "실업고 문제는 교육 양극화 해소의 중요한 부문이다. 임시국회(3월 2일) 직후인 3일 하루만이라도 지역구나 인근의 실업고를 찾아가 실태를 파악한 뒤 보고서를 내라"고 특명을 내린 것이다.

뜻밖의 숙제를 받은 의원들은 바빠졌다. 우선 학교 섭외가 만만치 않았다. 대부분의 학교가 "3월 2일 이후 개학하기 때문에 이번 주에 행사를 준비하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의원들은 3일 방문을 포기하고 다음주로 일정을 잡고 있다.

의원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A의원은 "당 지도부가 학사 일정도 파악하지 않고 방문을 독려한 것 같다"며 "가라고 하니 가겠지만 한두 시간 학생을 만난다고 무슨 해법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답답해했다. B의원은 "실업고가 어렵다는 말만 들었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다음주에 1일교사를 하며 고충을 파악해 보겠다"고 말했다.

여하튼 다음주부터 실업고에 여당 의원들의 발길이 잦아질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이 얼마나 현실을 꿰뚫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1970~80년대에 산업인력 공급 동맥역할을 했던 실업고는 대학 진학 창구로 변한 지 오래다. 90년 8%에 불과하던 진학률이 지난해는 68%로 뛰었다. 반면 취업률(84%→27%)은 3분의 1로 떨어졌다.

서울 S공고 교장은 "기능공은 못살고, 못 배운 사람이라는 인식 때문에 '스패너'를 놓고 무작정 대학에 가는 현상이 확대되고 있다"며 "정말 필요한 것은 의원들의 생색내기가 아니라 기능공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처우 개선"이라고 꼬집었다.

양영유 사회부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