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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43. 우드스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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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87년 문을 연 우드스탁은 록 음악인들의 아지트였다. 사진은 우드스탁에서 작곡에 몰두하고 있는 필자.

동업관계는 끝이 났지만 라이브 공연 문화를 대중화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내 아이들과 우리의 음악 문화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1985년 이태원에 있는 '태평극장'을 빌려 '락월드'를 열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록 콘서트장이었다. 어떤 이유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 태평극장은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큰 극장이라 웅장한 연주를 할 수 있는 장소였다. 라이브엔 제격이었다. 큰 아들 대철은 고3 때 거기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둘째 윤철이도 고 1때 무대에 올랐다. 지금 국내에서 록음악계를 이끄는 친구들은 거의 모두 그 무대에 한번쯤 섰을 게다. 당시 고등학생들이었지만 고교 록그룹이 번성하던 시기라 실력들이 만만치 않았다.

봄에 문을 열어 여름.가을까지는 그럭저럭 꾸려갈 만했다. 관객도 점점 늘어갔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극장 전체에 난방이 되지 않아 화장실 물이 얼어버릴 정도였다. 대책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았다.

그 뒤에 만든 게 지금의 우드스탁이다. 미국식의 록클럽을 제대로 만들고 싶었다. 퇴근 시간에 들러 가볍게 맥주 한 잔 하면서 음악도 듣고, 친구 얼굴을 보는 곳. 굳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클럽 말이다.

고맙게도 어느 독지가가 문정동에 있는 땅을 무료로 빌려줬다. 그 자리에 라이브 클럽 겸 작업실을 짓기 시작했다. 건축 재료로는 질 좋은 나무를 택했다. 나무가 방음이 잘 되기 때문이다. 나무로 짓다가 문득 '우드스탁(woodstock)'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우드스탁은 1969년 뉴욕 인근의 전원도시에서 열린 록 페스티벌이다. 69년 8월 15일부터 18일 오전 10시 30분까지 지속된 음악 사상 최고의 대형 축제였다. 반전을 외쳤던 히피를 중심으로 45만명이 몰려와 록 음악과 자유를 만끽했단다. 이 공연은 록음악 사상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그 이름을 따 간판을 걸었다. 87년이었다. 전국의 록 음악인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락의 대부가 아지트를 마련했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기타 하나씩 덜렁 둘러메고 꾸역꾸역 몰려오는 데 대책이 안섰다. 그 아이들은 매일 와봐야 죽치고 앉아 있어 자리나 차지할 뿐이었다. 그들의 음악은 대중이 소화하긴 어려웠다. 자기들만 좋아하는 그런 음악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반 관객은 하나도 없었다. 연주자도, 손님도 모두 록음악인이었다. 술 장사란 게 외상으로는 망하기 십상이다. 처음엔 금고에 돈이 좀 들어왔지만 곧바로 외상이 쌓이기 시작했다. 몇번 드나들며 얼굴을 익힌 뒤 외상이 갚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바싹 바싹 피가 말랐다. 전기세조차 납부하기 어려웠다. 돈도 돈이지만 내 생활도 차츰차츰 망가지기 시작했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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