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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인사이트] 장안과 베이징 … 중국 왕조 도읍은 왜 변두리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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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중국의 오랜 역사를 관통하는 대표적 도읍으로 두 도시를 꼽을 수 있다. 장안(長安)과 베이징(北京)이다. 중국이 장안을 수도로 한 세월은 서주(西周)와 당(唐) 등 800여 년이 넘는다. 베이징을 수도로 한 시기는 원(元)과 청(淸)은 물론 현재의 신중국까지 700여 년을 웃돈다. 재미있는 건 두 지역 모두 중국의 중심인 중원(中原)을 기준으로 본다면 변두리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만리장성이 베이징을 지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왜 그랬나.

장안은 서주~당 800여 년 도읍 #베이징은 원~신중국 700년 수도 #이민족이 중원 점령하고 난 뒤 #자신들 본거지 근처에 도읍 정해 #우리는 장안 문화권 존중했지만 #베이징 문화권은 낮게 보고 무시

장안 근처에 처음으로 선 나라는 주(周)다. 주나라를 세운 민족은 중원 지역에 뿌리를 둔 한족(漢族)이 아니라 서북쪽 험난한 곳에서 땅굴을 파고 살던 이민족이었다. 무(武)왕 때 산동(山東)성에서 하남(河南)성에 걸쳐 있던 은(殷)을 부수고 황하(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동서 지역을 통합했다.

은나라는 갑골문과 청동기를 사용하는 등 문화가 상당히 발전한 국가였다. 야만에 가까웠던 주가 비록 은의 한자와 문물을 수용하긴 했지만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선 강력하고도 잔인한 무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힘의 통치엔 언제나 위기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자기들 본거지에 가까운, 즉 중원 땅에서 보면 변두리에 불과한 지금의 시안(西安)에 도읍을 정했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언제든 고향으로 쉽게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구석진 곳에 도읍을 정하면 피지배 민족의 어려운 삶을 굳이 챙기지 않아도 되는 반면 자신들은 호의호식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장안을 도읍으로 한 중국 역대 왕조

장안을 도읍으로 한 중국 역대 왕조

주나라를 이어 시안 근처의 함양(咸陽)을 도읍으로 삼았던 진(秦)도 서북쪽에서 들어온 민족이다. 장안에 도읍을 정한 한(漢)나라 유방(劉邦)은 남쪽 장강(長江) 유역의 남만(南蠻) 출신이며, 수(隋)를 세운 양견(楊堅)이나 당(唐)을 건국한 이연(李淵)도 모두 서북쪽 민족인 선비(鮮卑)족 혈통의 사람들이다.

이들이 도읍한 장안이 한 곳이 아닌 건 왕조가 바뀔 때마다 새 왕조가 이전 왕조의 도읍으로 쳐들어와선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뒤 도성을 완전히 불태워 거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곤 그 근처에 더 호화로운 도읍을 건설했다. 이들 모두 비슷한 장소이기 때문에 가장 잘 알려진 장안이란 이름으로 통칭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지금의 시안 근처가 장안이라고 하지만 옛날 장안의 흔적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중국 사람이 시안에 가선 이런 탄식을 했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해만 보이고 장안은 보이지 않는구나(擧目見日 不見長安).” 현재 시안 시내에 있는 옛날 성벽과 망루는 훗날인 명(明)나라 때 서북 지방을 방위하기 위해 새로 만든 것이다.

베이징은 몽고족인 원나라가 중원으로 쳐들어와 정한 수도다. 역시 이민족이 힘을 통해 천하를 지배하려다 보니 도읍을 자기네 근거지인 몽고와 가까운 북쪽 변두리로 정한 것이다. 베이징에 대한 파괴가 장안처럼 심하지 않았던 건 원을 이은 명이 한족의 나라이고,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처음엔 수도를 남경(南京)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명에서 청으로 넘어갈 때도 명의 장수 오삼계(吳三桂)가 청군을 인도해 베이징을 빼앗았기에 파괴할 여유나 필요가 없었다.

장안 시대 왕조의 지배자들은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엔 스스로 한족으로 동화돼 한족의 전통문화를 이룩하고 발전시키는 주인공이 됐다. 따라서 한족이라는 민족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반면에 베이징 시대에 이르러선 중국 주변의 이민족들에게 민족의식이 생겼다. 이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몽고족과 여진족 모두 중국 땅을 정복하기 이전에 자기네 문자를 만들었다.

여진족의 청나라가 ‘여진(女眞)’이 야만적 인상을 준다고 생각해 자신들 종족의 호칭을 스스로 만주(滿洲)로 바꾼 것도 그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오랑캐라는 탈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또 자신들 문화를 한족에 강요해 중국 문화의 이질화가 심해진다.

재미있는 현상은 주와 한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스스로 한족으로 동화된 이후엔 강인한 기상이 약해지며, 또 다른 이민족에 자신들이 밀리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치는 부드러워져 백성들 삶은 안락해지고 학술과 문화가 이 시기에 크게 발전하곤 한다.

본디 중국이란 천하엔 따로 주인이 없었다. 누구든 하늘의 뜻을 핑계 삼아 무력으로 천하를 차지하기만 하면 천자(天子)가 되고 또 한족이 될 수 있었다. 중국 땅 안엔 본시 한 민족만이 산 게 아니라 여러 종족이 한데 모여 ‘천하’라는 큰 나라를 이뤄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의사소통은 한자(漢字)가 맡았다. 결국 중국 왕조의 교체는 왕국의 성격만 달라지게 한 게 아니라 그 왕국에 살고 있는 ‘한족’의 성격도 바꿨다.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기구는 원래 백성을 평안히 잘살게 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고 착취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도읍의 경우도 장안이나 베이징은 백성을 잘살도록 다스리기 위해 마련한 수도가 아니었던 셈이다.

우리는 중국의 수도가 달라지고 그 문화의 성격이 변하는 데 따라 그들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했다. 그들이 장안을 도읍으로 하고 자신들 전통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을 적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배우려 했다. 장안 문화권과는 사이도 좋았고 그들에 대해 비교적 잘 알았다.

그러나 베이징을 도읍으로 한 몽고족의 원나라는 달리 대했다. 비록 그들의 힘에는 굴복했지만 그들의 문화를 낮게 보고 무시했다. 명대에 다시 관계가 회복됐지만 청대에 이르러선 우리와의 거리가 더 멀어졌다. 베이징 시대에 와서 우리와 중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성격이 다른 문화의 나라로 발전하며 사이가 벌어졌다.

문제는 이후 우리의 중국 사람,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금 중국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민공화국으로 발전해 있다. 우리는 여전히 중국을 잘 모른다. 한 예로 14억 중국인 모두가 전통 연극인 경극(京劇)을 사랑하지만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중국이 우리가 잘 알아야 할 이웃 나라라는 점에 이견은 없다. 중국 사람들의 생활이나 그들의 성격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에 토를 달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결국 관건은 중국 알기를 위한 우리의 치열한 노력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김학주

서울대 중문과 교수와 중국학회, 중국어문학회 회장 역임. 한국의 중국고전문학과 문학사 연구에 큰 업적을 쌓았으며 『중국문학사』는 우리나라 중국문학계를 대표하는 저술로 꼽힌다.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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