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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깨기의 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60호 29면

공감 共感

오랫동안 은폐되어 온 성폭력 상황들이 침묵을 깨고 터져 나오고 있다.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성폭력 폭로가 해시태그를 단 ‘#미투(Metoo·나도 당했다)’ 파장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2017년, 세계는 ‘성희롱은 어디에나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게 보여 줬다”(CNN 11월 25일)는 보도도 나왔다.

성폭력 폭로 ‘#미투’ 파문 확산 #1983년 영화 ‘침묵에 대한 의문’ #여성이 침묵 깬 2017년 예고한 듯

인터넷 속도와 광대역 인터넷 보급률에서 세계 1위인 한국에서도 인터넷이 성폭력에 관한 침묵깨기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해 ‘문단 내 성폭력’ 고발사태 이후 문화예술계에서도 침묵 깨기 파장이 퍼져나가는 중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09년 5월 출범했던 ‘침묵을 깨는 아름다운 사람들’ 연대 모임이 기억 세포를 자극한다.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한 여성 연예인이 목숨을 끊었다. 바로 장자연이다. 그녀가 당한 성상납 협박에 분노한 사람들이 여성 연예인 인권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었던 모임이 ‘침묵을 깨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이젠 그보다 더 큰 현재진행형 인터넷 파장으로 성폭력 문제 제기가 일상에 불어닥치는 세상 속에 희망이 보인다. 그래서 추워지는 겨울이 하루하루 다가오더라도 침묵 깨기 연대감의 온기에 감사한 마음도 생성된다.

성폭력을 당해도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게 공론화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체념하거나 포기하며 속으로만 앓았던 그들은 공기같이 보이지 않게 퍼진 성차별적 집단무의식의 이중적 피해자이기도 했다. 위계질서라는 가부장적 관습의 이름으로 유지되어 온 침묵의 카르텔은 피해자에게 이중, 삼중 그 이상의 압박을 가해 왔다. 자신의 피해를 토로하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받을 것이란 관습 때문에 기본적 인권조차 스스로 챙기지 못했던 이들이 인터넷 세상에서 연대의 힘을 얻고 있다.

그런 연대의 희망은 ‘침묵에 대한 의문’(1983, 마를렌 고리스)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고리스가 만든 ‘안토니아스 라인’(1995)은 가부장적 혈연가족의 경계를 넘어선 대안가족 관계의 훈훈함을 보여 준다.

거의 20여 년 만에 유튜브에서 거친 화질로 다시 찾아본 ‘침묵에 대한 의문’은 다르게 반복되는 세상사를 절감하게 해 준다. 세 여성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다룬 이 작품은 여성의 침묵을 내면까지 깊이 파고든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봐서는 따라잡기 힘든 불친절한 영화다. 그러나 변하는 세상 어디에서든, 그리고 이 땅에서 벌어진 성폭력 피해자 여성들의 침묵에 공감한다면 보다 강렬하게 접속 가능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침묵하기와 침묵 깨기의 차이를 둘러싼 흥미로운 지점을 보여 주는 명작으로 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법정장면을 클라이맥스로 보여 주는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의 시내 쇼핑센터 옷가게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다룬다. 무료하고 반복적인 가정 살림,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아 침묵의 일상을 영위하던 가정주부는 아들을 유모차에 태워 옷가게에 들린다. 그곳에서 옷 정리를 하느라 남성 주인이 한눈을 파는 사이, 가정주부는 옷을 고르는 척하면서 그 옷을 자신의 가방에 몰래 넣는다. 이런 사실을 발견한 주인은 그녀를 모독하는 태도로 상황 해결에 나선다. 순간 그녀는 그간 이 세상에서 무시당해 온 분노가 폭발이라도 한 듯 그에게 폭력을 가한다. 마침 그곳에 있던 다른 두 여성, 즉, 갑질하는 상사에게 무시당해 온 비서직 여성과 식당 종업원 여성도 가정주부와 함께 가게주인 제거에 나선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사건의 합리적 징벌을 위한 재판이 열린다. 이 세 여성이 비정상적 상태임을 증명하는 검찰 측 임무를 맡은 여성 심리학자는 그들의 내면을 분석하며 오히려 주부의 침묵과 그들의 분노를 점점 이해하게 되면서 그들은 미치지 않은 정상상태라고 증언한다.

그러나 이런 증언은 가부장적인 재판장에서 용납되지 못한다. 막판에 침묵을 깨고 폭소로 이어지는 전복적 결말을 보노라니, 이 작품은 조신한 여성 되기에 길들여진 여성의 침묵이 21세기 인터넷 파장을 타고 깨져 나가는 2017년을 예고한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지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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