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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구 경매」 없어져야 한다|송진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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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선거구를 둘러싼 여야 협상이 연일 크게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며칠 전 신문 사회면 한 구석에 정치 자금 법 위반혐의로 전 정당간부가 기소됐다는 1단 짜리 기사가 눈에 띄었다. 85년 2·12 총선 직전 돈을 내고 민한 당 전국구 후보에 들어갔던 L모씨에게 『당선 가능한 전국구후보 순번을 주겠다』면서 세 차례에 걸쳐 1억 원을 받았다는 것이 그의 혐의 내용이었다. 돈을 준 L씨도 같은 정치 자금 법 위반 혐의로 함께 기소됐다.
당시 기억을 더듬어 보면 L씨는 민한 당에 11억 원을, 김모 간부에게는 따로 1억 원을 내고 그때로서는 당선 안정권으로 보였던 전국구 후보 14번으로 공천됐다가 2 12선거에서 민한 당이 예상외로 패배하는 바람에 낙선됐으며, 그 후 유치송 총재 등을 상대로 돌려 받지 못한 6억 원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냈으나 『정치헌금은 낙선됐더라도 되돌려 받을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았었다.
야당이 전국구를 경매에 붙이듯 헌금 액수에 따라 공천한데서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해프닝 이었던 것이다.
2·12 선거 당시 민한·신민·국민당 등 야당은 예외 없이 전국구를 선거자금 조달의 명분으로 거액 헌금을 받고 팔다시피 했다. 겉으로는 당 유공자·직능별 전문인력 확보 등을 내세웠지만 당선 확정 권·당선 안정권·당선 가망 권 등으로 분류해 1억∼5억 원씩의 헌금을 받았던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 결과 전혀 무명의 재력가가 당의 장로나 유공자를 제치고 전국구 순번의 상석을 차지했는가 하만, 야당과는 무연했던 전통대·전평통 인사들이 야당의원으로 등장했고, 심지어 민정 당 후원회원까지 야당 전국구로 당선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인사들이 국회에 들어와서는 좋은 야당의원 노릇을 했는가. 그 대답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12대 국회의 역정에서 드러났듯이 대여투쟁이나 당의 발전에 있어 이들의 기여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볼 밖에 없고 그 중에는 당론 집약이나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당의 단합에 저해 요인이 된 인사들도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돈 중심의 전국구 공천에는 으레 심각한 후유증이 뒤따랐다. 돈 때문에 밀렸던 당료들이 진상조사위원회니, 정화 동지 회니 따위를 만들어 당 지도부에 거세게 반발했고, 몇 십억 원에 달하는 전국구 헌금을 다 어디에 썼느냐고 아우성이 터지고 당수가 피신하는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전국구가 아니라 「돈국구」라느니, 「전국구」라느니 하는 조롱이 나오고 여당에서는 「야당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대야 공격의 호재로 삼았으며, 두고두고 야당의 약점이 됐던 것이다.
이런 일은 불과 3년 전의 일로 아직도 많은 국민이 생생히 기억하고 상당수 관련 당사자들이 정계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전철을 교훈 삼아 다시 선거 철을 맞은 이 시절에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인가. 대답은 없어야 한다고 간단히 나올는지 모르나 돌아가는 낌새를 보면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은 다분히 엿보이고 있다.
이번 경우 전국구 의석 수나 정당별 배분방식은 아직 알 길이 없다. 여야간 선거법 협상 결과를 봐야겠지만 각 당 안에 따르면 55∼85석으로 현재의 92석보다 수가 적다. 그러나 여당의 안정세력을 전국구 의석으로 보장해주는 방법으로 선거구 문제의 돌파구를 열려는 야당의 일부 움직임으로 보아 협상결과에 따라서는 전국구 의석수가 크게 늘어날 소지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야당으로서는 전국구가 가장 큰 정치자금 원이므로 말하자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이처럼 아직 몇 석이 될는지도 모를 전국구 의석을 놓고 야당 가에서는 벌써부터 「침 삼키는」소리가 많다는 얘기가 들린다. 3년 전 공 칭 5억이던 헌금 기준이 이번엔 배 이상으로 뛰어올라 『10억 내고 들어올 사람은 줄을 설만큼 많다』는 얘기가 나오는가 하면, 전국구 헌금이 들어오면 대통령 선거 때 진 빚을 갚고 지역구 후보 1인당 몇천 만원 씩 지원도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슴 부푼 계산도 한다는 것이다.
서로 말은 않고 있지만 전국구 의석수가 적어 질까봐 내심 걱정하는 분위기도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전례로 보면 당 수뇌나 공천심사위원쯤 되면 전국구 추천 권을 행사 하고 그에 따라 적잖게 재미를 볼 수도 있었으니 숫자가 관심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 이미 전국구 몇 석을 처분했다는 설도 그럴싸하게 나돌고 있다.
야당 가의 이런 분위기를 보면 이번에도 전국구 공천은 별로 개선되지 않지나 않나 하는 우려가 절로 나온다.
여당과는 달리 정치자금 조달에 어려움이 있고 재력가의 입당이나 후원을 기대 할 수도 없는 야당으로선 목돈이 드는 선거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구 헌금을 안 받을 수 없다는 현실적 불가피 론을 펼 수도 있다. 실제 야당에 헌금과 전국구를 관련시키지 말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국구가 무엇인가. 유권자의 사표를 살리는 비례대표의 성격과 전국적 인물의 국회 진출, 각계 전문인력의 흡수를 위한 직능 대표적 성격 등이 전국구 제도의 취지라 할 것이다. 전국구 의원도 국회의원이요, 국민의 대표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돈도 돈이지만 돈 외의 요소도 생각해야 마땅하다. 명망·식견·당성 등이 단순히 명분일수만은 없으며, 가뜩이나 인물난인 야당의 새 인물충원이란 요청도 한가한 주문이라고만 하긴 어렵다. 이런 바람직한 기준만으로 전국구 인선을 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돈 때문에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이런 기준과 돈을 조화, 절충하는 차선이라도 택하는 게 옳다. 경매하듯 고액 헌금 자를 상석에 모시고 「웃돈」이나 넘보는 식의 「알몸정치」가 이번에는 없기를 미리부터 당부하고 싶다. 송진혁 <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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