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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슬럼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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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흔히 쓰는 '슬럼프(slump)'란 말은 사실 경제용어다. 극심한 경기침체를 말한다. 1929년 세계대공황을 '그레이트 슬럼프'라고도 부른다. 비슷한 말로 규모와 기간에 따라 '슬로다운(slowdown)''리세션(recession)''디프레션(depression)' 등이 있다.

경제학자들조차 혼동해서 쓰다 보니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용어의 차이를 규정한 적이 있다. 당신 이웃이 실직하면 슬로다운, 당신이 실직하면 리세션이며 경제전문기자가 일자리를 잃으면 그게 디프레션이라는 얘기다.

슬럼프는 당신이 맞벌이 부인과 함께 실직하는 경우쯤에 해당되겠다. 교과서적 의미로는 생산이 10% 이상 감소하는 경우가 슬럼프다.

그만큼 심각한 게 슬럼프다. 하지만 언제든 누구에게든 올 수 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도 두 차례 슬럼프가 있었다. 1998년과 2004년이다. 각각 한 번의 우승밖에 건지지 못했다. "이빨 빠진 종이호랑이"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러시아 추상화가 칸딘스키도 깊은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마음에 드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한동안 소질이 없다고 비관하며 거리를 방황했다.

하지만 슬럼프는 도약을 위한 숨고르기일 뿐이다. 슬럼프에서 돌아온 호랑이의 포효는 귀청을 찢었다. 99년 6연승을 포함, 8개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US오픈.브리티시오픈.PGA챔피언십.마스터스를 차례로 평정해 '타이거 슬램'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2005년에도 마스터스.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었다.

우즈를 슬럼프에서 건져낸 건 연습이었다. 트로피를 받고 샴페인을 터뜨리는 대신 연습장에서 스윙을 다듬고 체력을 기른 결과다. 칸딘스키의 경우는 좀 다르다. 어느 날 오랫동안 찾지 않던 화실에 들른 칸딘스키는 벽에 걸린 명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자신의 그림을 거꾸로 걸어놓은 것이었다. 칸딘스키는 깨달았다. 보기에 따라 자신의 잠재력이 엄청나게 다른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요즘 축구선수 박주영을 두고 말들이 많다. '축구천재'니 뭐니 호들갑을 떨더니 조금 부진하다고 벌써 "속았다" "과대포장됐다" 성마른 불만이 쏟아진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슬럼프를 탈출하는 것은 박주영의 몫이다. 그때까지 그를 믿고 기다려주자. 언젠가 현란한 드리블과 함께 돌아올 그 앞에서 부끄러워질 말들은 좀 아껴두면서 말이다.

이훈범 week&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