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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진 킹, 그리고 미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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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장혜수 스포츠부 차장

장혜수 스포츠부 차장

주말 아침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을 봤다. 영화는 같은 대회에 출전하고도 남자보다 적은 상금을 받는 등 차별받던 여자 테니스 선수들이 권리를 쟁취하는 여정을 그렸다. 영화의 배경으로 1973년 벌어진 빌리 진 킹과 바비 리그스의 테니스 남녀 성(性) 대결(영화 원제는 ‘Battle of the Sexes’, 즉 ‘성 대결’이지만 국내에선 ‘세기의 대결’로 바뀌었다)이 등장한다.

당시 29세의 ‘여성 최강자’ 빌리 진 킹은 55세의 남자 시니어 선수 바비 리그스를 세트스코어 3-0으로 꺾었다. 이를 계기로 US오픈이 그해 테니스 메이저 대회 중 맨 먼저 남녀 간 상금 차별을 없앴다. 영국 윔블던이 2007년 마지막으로 따라갔다. 일각에선 세 세트를 따야 이기는 남자가 두 세트만 따면 이기는 여자와 같은 상금을 받는 건 오히려 역차별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테니스 메이저대회는 남녀가 같은 기간 같은 장소에서 경기하는 만큼 같은 상금을 받는 게 합리적으로 보인다.

영화는 스포츠와 성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성차별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할 문제가 스포츠 성폭력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국내외에서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었다.

미국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스캔들이 불거진 뒤 영화계에서는 여배우들의 피해 사실 폭로가 이어졌다. 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이를 성폭력 고발 캠페인 ‘미투(#me too)’로 발전시켰고 폭로는 더욱 퍼졌다.

영화계 못지않게 ‘미투’를 외친 분야가 스포츠계다. 미국 여자체조 선수 매카일리 마로니에 이어 팀 동료 애리 레이즈먼이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 미국 여자 축구선수 호프 솔로도 제프 블라터 전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으로부터 성추행당한 사실을 공개했다. 국내에서도 스포츠 성폭력 피해자 김모씨가 최근 ‘미투’ 운동을 시작했다. 김씨는 10살이던 2000년대 초 테니스 코치로부터 성폭행당했다. 이를 묻고 살던 김씨는 가해자가 지금도 초등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지난해 알게 됐다. 추가 피해자를 막기 위해 용기를 내 가해자를 고소했다. 지난달 징역 10년이라는 중형을 끌어냈다.

2012년 이후 5년여간 대한체육회 산하 스포츠인권센터에 접수된 성추행 및 폭행 신고는 170여 건이다. 수면 아래 감춰진 사건은 더 많을 것이다. 빌리 진 킹이 승리하자 동료는 “세상이 변했어. 방금 자기가 세상을 바꿨잖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윔블던까지 바뀌는 데는 그로부터 30년 넘게 걸렸다. 김씨의 용기가 헛되지 않기를, 그리고 세상이 바뀌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이 ‘미투’라고 말할 때다.

장혜수 스포츠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