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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승일의 시시각각

이제 인천공항을 놓아 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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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홍승일 수석논설위원

인천국제공항이 문재인 정부 ‘비정규직 제로 공기업 1호’의 표적이 된 건 거대 공기업 중에 간접고용 비중이 크기로 이름난 탓이었다. 종사자의 90% 가까운 1만 명의 비정규직을 모조리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역사(役事)는 42만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에 족했다. 취임 원년의 가슴 벅찬 드라마로도 연출이 가능했다.

1만명 연내 정규직화는 신기루 #올림픽 잘 치른 뒤 해도 안 늦어

문 대통령이 취임 이틀 만인 5월 12일 부랴부랴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아 최고경영자에게 이런 약속을 받아낸 지 반년이 넘었다. 하지만 적어도 ‘연내’라는 약속은 거의 공수표가 되게 생겼다. 공사 의뢰로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이 23일 내놓은 컨설팅 결과는 그간의 회의론을 뒷받침했다. 약속시한인 올 연말까지 정규직화 100%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우선 노사와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이해가, 어느 정도 예상은 됐지만 너무 엇갈렸다. ‘안전·생명에 직결되는 직종부터 정규직화한다’는 정부 지침부터 보자. 이런 직종을 경찰·소방 정도로 국한해 직접고용 형태의 정규직 전환은 10% 안팎에 불과하다고 보고서는 판단했다. 공사는 대체로 이쪽이다. 이에 비해 비정규직이 선호하는 보고서는 50% 이상을 경쟁절차 없이 정규직으로 고용 승계하라고 제안했다.

더욱이 공항은 다양한 직업의 만물상이다. 보안·청소·안내 등 60종의 용역계약과 50종 직군별로 정년과 급여·복리후생이 제각각이다. 근로자 소속도 민주노총·한국노총·개별노조 등으로 다양하다. 민주노총 쪽 근로자 1100여 명은 “경쟁 절차 없는 100%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이달 초 공항에서 시위를 벌였다.

커지는 비정규직 목소리에 정규직이 응수하면서 노-노 갈등마저 가열됐다. 공청회가 열린 23일 인천공항 서관은 정규직-비정규직의 일자리 전쟁터였다. 정규직 노조는 ‘무임승차 웬말이냐, 공정사회 공개채용’ ‘결과의 평등 No, 기회의 평등 Yes’라는 피켓을 여럿 들고 세 과시에 나섰다. 초임 정규직들의 발언. “노량진 공시촌에서 3수·4수해 가며 시험쳐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다. 갑자기 경쟁 없이 들어오는 게 정의로운 일이냐.” 비정규직 쪽에서는 “인천공항이 세계 일류 공항이 된 데는 반 토막 임금 받으며 헌신한 비정규직이 있었다. 정규직은 우리 가슴에 못 박지 말아 달라”고 했다.

정규직 전환을 탈원전 에너지 전환처럼 몰아붙이다간 인천공항이 망가질 수 있다. 비정규직의 희망이 아니라 무덤이 될 수 있다. 시정되지 않는 차별대우를 생생히 목격하면서 한 지붕 안에서 살아야 한다면 더 잔인한 일이다. 거대 공사끼리 통합한 LH(한국토지주택공사)도 8년이 되도록 화학적 융합이 잘 안 돼 노조가 3개나 된다. 대한민국에서 구조가 가장 복잡한 공기업의 비정규직 1만 명을 군말 없게 정규직으로 만드는 일이 일곱 달 안에 가능할까. 아무래도 청와대 참모가 지난 5월 대통령에게 시범 공기업 번지수를 잘못 가르쳐 준 것은 아닌지.

이쯤 되면 인천공항을 그만 놔줘야 한다. 새 정부 정규직 해법의 산뜻한 필드 매뉴얼을 만들어 내도록 말미를 충분히 주자. 인천공항의 묘책을 기다리는 많은 공기업에 롤모델이 돼야지 실패 백서가 돼선 안 된다. 12년 연속 세계 공항평가 1위에 빛나는 인천공항을 “일자리 실험의 몰모트로 썼다”는 비난을 들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의 관문, 평창 겨울올림픽의 최전선인 인천공항. 당장 내년 1월 제2 여객터미널 개통과 2월 올림픽 국가 대사 준비에 매진하도록 숨통을 터 주자. 유엔이 선포한 올림픽 평화기간처럼 인천공항의 일자리 싸움에도 휴전을 선포하자. 정규직 추진은 올림픽 후로 미뤄도 늦지 않다.

홍승일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