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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자율화 시급하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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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희랍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현상의 발전을 지배하는 역학 상황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사회, 나아가 생물의 발전을 지배하는 역학상황과 같다』고 주장했다. 화산폭발·대지진·한파내습 등 자연계에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급격한 질적 변화, 즉 카타스트로피 현상은 혁명·전쟁·유행병 등과 같이 인간사회의 발전과정에서도 나타난다.
밀폐된 용기예 물을 넣고 열을 가하면 차츰 뜨거워지다가 비등점에 달하면 별안간 끓어오른다. 열을 더 가하면 수증기 압력에 못 이겨 폭발하고 만다.
그래서 압력솥이나 보일러에는 반드시 압력 조절장치가 붙어있게 마련이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다. 갈등과 모순이라는 얼이 가해지면 긴장도가 고조되다가 갑자기 파국적 현상을 맞게된다. 따라서 사회적 열기를 흡수 분산시키는 안전판을 갖지 못한 사회는 언제고 폭발위험성을 내포한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해학·탈춤·풍물놀이 등 카타르시스의 몸부림을 통해 세속적 간난과 모순을 스스로 용해시키고 극복하는 놀라운 지혜를 보여줬다. 그러나 이렇게 자제된 불만을 체념 또는 굴종이라고 간과해 버린 지배계층은 민란이라는 형태의 카타스트로피에 수없이 직면케 되었던 것이다.
지난해 4.13조치에서 비롯된 일련의 사태에서 그 동안 눌려왔던 내부의 갈등과 모순이 일시에 표출되면서 그 열기도 비등점에 가깝게 육박해가고 있음을 확인했고, 이것이 투표라는 과정으로 진정돼 기다림과 바람으로 바뀌는 민심변이의 카타르시스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시적 카타르시스가 지속적인 사회안전판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조만간 열기는 다시 끓어오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민선정부에 거는 기대 또한 크다. 특히 정부 주도의 성장정책에 가려왔던 분배와 기회참여의 불균형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주장과 아울러 경제운용의 자율화 내지는 민간주도경제로의 이항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하나 안전판이 빈약한 상황에서 자율화란 끓는 물에 기름 붓는 일인지 모른다. 오히려 촉매로서 기대감의 포덴설을 높여 상대적으로 비등점을 더 낮추는 일이 되기 쉽다. 따라서 경제현실을 들여다보고 자율화를 위한 배경으로 질적 체질개선 등 안전판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경제규모는 관주도로 끌어가기엔 몸집이 비대해졌고 메커니즘도 복잡해졌다. 때문에 소수 엘리트 관료들이 조목조목 메스를 가하기엔 물리적으로 힘에 부친다. 통상 난해한 수학문제를 물다 막히면 원점으로 돌아가 기본부터 차근차근 풀어가야 한다. 우리경제를 대함에 있어서도 같은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그간 우리가 이룬 경제의 성과는 가히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양적 성장위주에 주어진 정책적 프리미엄은 구조적 불균형이라는 일그러진 댓가를 남겼다. 이런 불균형은 나름의 관성력을 지닌다. 왜곡상황에서의 자율화는 상처를 더욱 악화시킬 우려가 크다. 따라서 매듭은 풀고 형평유지의 선상에서 새롭게 시작돼야 한다. 보다 왜곡을 가져온 근본원인으로 돌아가 치유적 해결을 구하고, 성장혜택의 배분에서 소외되거나 억눌린 부분과 계층에 대한 남다른 배려가 이뤄져야 함이 당연하다.
그 다음 커다란 테두리로서 공정한 게임 룰과 심판이 마련돼야 하며, 정부는 일사불란함을 요구하던 종전의 조급함을 버리고 참고 기다리는 인내를 가져야 한다.
임단 지반이 다르면 집틀도 달라야 하듯 성숙한 시장경제로의 이행에 맞춰 경제를 보는 시각과 분위기, 나아가 철학까지도 달라져야 한다. 첫째, 계량적 지표를 통해 경제를 보아오던 기존의 인식틀을 버려야한다.
보이는 지수경제와 느끼는 감각경제에는 분명 큰 갭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시각이 바뀌어야 함을 말해준다. 역사적·사회적 실체로서 시공간에 따라 규정되는 국민경제의 질적 발전의 다이너미즘을 이해하려면 현대경제학의 실증계량적 분석방법만으론 안된다. 직관에 바탕을 둔 원융적 사고와 규범적 고려가 병행되어야할 것이다.
둘째, 선성장-후분배의 이데올로기적 환상도 깨져야한다. 파이를 키우고서 나누자는 발상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키우는 과정에서 소유관계가 굳어지고 세력의 체제화가 심화될 경우 나눔에 있어 혁명적 방법의사용을 불가피하게 할 수 있다.
세째, 성과 내지 기능위주의 가치관도 바꿔야한다. 성과지향의 편중정책과 수단의 적법성·도덕성의 경시는 경제의 파행성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물질 우선의 사회풍조로 정신문화의 오염과 각종 몰가치·반도덕적 변리현상을 만연시키고 있다.
또 노동을 단순히 하나의 생산요소로서 비용절감의 대상으로 보는 것과 같은 기능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를 목표달성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실현시키는 과정으로 보는 인식의 대전환과 삶의 권리의 존중이 경쟁시장원리와 함께 모든 사회적 의사결정의 바탕이 돼야 할 것이다.
개혁이란 미명아래 강제와 폭력으로 기존질서를 뒤흔들어 놓은 다음,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서슬 퍼렇던 개혁의지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다만 상처만을 남겨 놓았던 과거의 전철을 다시 밟는 어리석음을 이번에도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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