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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똑같이 시와 술을 사랑한 서거정과 김시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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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정출헌·고미숙·조현설·김풍기 지음, 한겨레출판, 279쪽, 1만1000원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은 '고전(문학)의 위기'에 대한 반성과 고민의 산물이다. 소장 인문학자 4명이 화석이 돼버린 고전문학을 동시대성을 지닌 오늘의 문학으로 살리는 방법이 없을까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필진에는 2003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발표해 '고전 다시쓰기'의 스타로 떠올랐던 고미숙씨의 이름도 보인다. 인문학 분야 교수.대학원생 등이 참여한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공개강의했던 내용이 바탕이 됐다.

이 책에는 '역사의 라이벌' 18명이 등장한다. 월명사와 최치원, 김부식과 일연, 정도전과 권근, 서거정과 김시습, 김만중과 조성기, 박지원과 정약용, 신재효와 안민영 등이 그들이다. 짝짓기 형식을 빌어 저자들이 야심차게 시도한 것은 '무엇이 이러한 작품을 낳았는가'다.

작품론이 기본 뼈대를 이루고 있지만, 인물을 중심으로 살을 풍부하게 붙이고 이를 시대의 풍경을 소묘하는 선까지 끌어올려 흥미와 긴장을 잃지 않으려 애쓴 점이 눈에 들어온다.

서거정(1420~88)과 김시습(1435~93)의 경우는 인생 역정의 엇갈림을 지목하고, 그 실마리를 세조의 왕위 찬탈에서 끄집어낸다. 왜 그들은 똑같이 시와 술을 사랑했으되 "한 사람은 향기로운 술과 한가로운 시 짓기, 다른 한 사람은 쓰디쓴 술과 괴로운 시 짓기"였을까? 그 답은 원종공신으로 승승장구한 삶과 생육신으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던 삶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거리의 정치가' 서포 김만중(1637~92)과 '골방의 병든 서생' 조성기(1638~89)가 '사씨남정기'와 '창선감의록' 등 주옥같은 소설을 생산한 배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덜컹거렸던 사회질서를 가부장권 확립을 통해 다잡아야 한다는 교감이었다. 정도전(?~1398)과 권근(1352~1409)은 왜 똑같이 개국공신이면서 말로는 그리 달랐을까. 두 사람이 지은 악장을 보면 왜 최고 권력자가 정략적 필요성에 따라 두 사람을 달리 대접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은 이처럼 문학 작품을 읽을 때 텍스트에만 시선을 고정하는 단선적 접근을 피하고 작가와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눈을 돌려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한 해석을 해나간다. 물론 라이벌로서 대립항을 세우다보니 그 해석이 명쾌하기도 한 반면, 어느 정도 견강부회를 할 위험도 엿보인다. 자유로운 해석은 그 자체로 유쾌하지만, 자의적 해석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연암 박지원을 '유목민''전위적 스타일리스트'로, 다산 정약용을 '정착민''치열한 사회참여주의자'로 보는 식의 해석에는 얼마든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또다른 논쟁과 문제의식이 생산된다면, 이또한 '고전(문학) 다시 쓰기'가 발산한 긍정적 효과가 아닐는지. '인문학의 위기'를 운운하는 요즘, 반가운 저작임에는 틀림없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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