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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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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흔히 기자는 사실(fact)을 좇는다고 얘기한다. '사실 보도'를 추구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기자가 좇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眞實)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2004년 2월 5일 국회 법사위에서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100억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의 사본을 공개했다. 홍 의원은 이 CD가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축하금 중 일부라고 주장했다. 이런 CD 형태로 1300억원이 은닉돼 있으며, 노 대통령의 동문인 모 은행 지점장이 이를 관리하고 있다고 홍 의원은 폭로했다. 엄청난 파문을 불러올 수 있는 초대형 폭로였다. 홍 의원의 폭로는 면책특권이 보장되는 국회 회의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본지 확인 결과 홍 의원이 제시한 CD는 위조된 것이었다. 해당 CD의 번호와 같은 원본 CD를 구해 보니 두 CD가 여러 점에서 달랐다. CD를 발행한 은행과 증권예탁원 등에서 쉽게 확인된 내용이다. 본지는 다음날 신문에 원본 CD와 홍 의원이 공개한 CD의 사진을 나란히 게재하면서 폭로된 CD가 위조 CD임을 밝혀내 엉뚱한 파장이 계속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졌던 때의 일이다. 이 전 부총리의 땅을 산 사람이 트럭 운전사라는 사실이 일부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곧바로 땅을 살 만한 재력이 없는 트럭 운전사에게 땅을 판 이 전 부총리에게 뭔가 구린 데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으로 연결됐다. 땅 매입자가 트럭 운전사라는 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는 의혹의 진실과 관계없는 사실이다. 사실을 넘어선 진실을 보지 않은 것이다. 땅 매입자가 트럭 운전사라는, 진실과 거리가 먼 사실이 의혹만 부풀린 사례다.

뒤늦게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사실도 적지 않다. 2002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비리라며 폭로된 여러 사실이 나중에야 법원에서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이 전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은폐 의혹이었던 병풍(兵風.이 전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은폐 의혹) 사건이나 정치자금 의혹을 산 기양건설 사건, 20만 달러 사건 등이 진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밝혀졌다.

홍 의원의 위조 CD는 곧바로 진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낼 수 있었지만, 이 전 후보와 관련된 의혹의 진실을 쉽게 밝혀내지 못하고 일부에서 주장한 사실이 그대로 퍼졌던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기자로서 참담한 심정이다.

최근 불거진 KTF의 정부 로비 의혹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KTF가 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정보통신부 등에 전방위 로비를 펼쳤다는 내용이 적힌 내부 문서가 공개됐다. 문서는 특히 국세청 세무조사를 연기하기 위해 80억원의 회의비.접대비 예산을 편성했다고 기록했다. 이 문서가 KTF 내부에서 작성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세청은 세무조사 연기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신청만 하면 되는 일이라며 펄쩍 뛰었다. 내부 문서에 기재된 사실임에는 틀림없지만, 진실이라고 보기 힘든 내용이다.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기 전에 이런 사실이 여과 없이 알려지면서 해당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실과 진실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다. 진실이 아닌 사실에 현혹되지 않도록 항상 긴장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한다.

이세정 경제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