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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이 기적이라던 영화, 12만 관객 울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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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발달장애를 가진 서른 살의 아들 인규(김성균)를 두고 세상을 떠나게 된 노모 애순(고두심)이 이별을 준비하는 이야기인 ‘채비’. [사진 오퍼스픽처스]

발달장애를 가진 서른 살의 아들 인규(김성균)를 두고 세상을 떠나게 된 노모 애순(고두심)이 이별을 준비하는 이야기인 ‘채비’. [사진 오퍼스픽처스]

신예 감독이 장애인 가족을 그린 작은 영화가 벌써 12만 명의 관객을 울렸다. 감독에 따르면 “슬픔으로 관객을 자극하는 게 싫어 ‘더 슬플 수도 있는’ 장면은 편집 과정에서 아낌없이 들어냈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채비’(감독 조영준) 얘기다.

입소문 흥행 작은 영화 ‘채비’ #지적 장애 아들과 노모의 얘기 #고두심·김성균 내공연기 눈물바다 #신예 조영준 감독, 절제된 연출 #“더 슬픈 장면일수록 덜어내려 했다”

‘채비’는 발달장애를 가진 서른 살의 아들 인규(김성균)와 그를 24시간 돌봐야 하는 엄마 애순(고두심)의 생활을 그린 이야기. 자신의 도움 없이는 밥 한 끼도 해결하지 못하는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엄마가 아들의 홀로서기를 희망하며 이별을 차근차근 준비해가는 과정을 좇는다.

영화는 관객을 ‘웃기고 울리기 위한’ 자극적인 장치 없이 관객을 몰입시킨다. 대단한 사건이 없는데도 고두심·김성균 두 배우가 보여주는 모자의 일상으로 감정을 서서히 고조시키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장편 데뷔작에서 절제된 연출력을 보여준 조영준 감독(37)을 만났다.

TV 프로를 보고 구상했다고.
“2013년 ‘세상에 이런 일이’(SBS)다. 보고 정말 많이 울었다. 80대 노모는 청소부로 일하고, 50대 지적 장애 아들은 어머니 없이는 아무 일도 못 한다. 어머니가 아파트를 청소하는 동안 아들은 아파트 꼭대기 층 복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퍼즐을 하며 어머니를 기다리고. 말미에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내는 영상편지에서 웃으면서 ‘네 덕에 심심했던 적이 한 번도 없고, 매일 재미있고 행복했다. 너는 하늘이 내게 보내준 천사 같아’라고 하더라. 이 말은 영화 대사에도 썼지만, 내겐 정말 큰 충격이었다. 세상의 수많은 ‘인규 어머니’를 위로해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영준 감독

조영준 감독

조 감독은 다큐 속 노모가 ‘아들과 한날한시에 죽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듣고 문득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아들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다고 한다. 장애인 가족을 만나고 보호 시설 등을 찾아다니며 취재하기 시작했다. 취재할수록 장애인 보호자가 세상을 떠난 뒤 장애인을 돌보는 사회 시스템이 굉장히 열악하다는 걸 알게 됐다. “다큐를 보기 몇 달 전, 서울의 모 구청 홍보팀에서 일하며 지방에 있는 장애인 보호 시설을 방문한 경험도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됐죠. 그때 본 시설의 충격적인 이미지는 중 엄마인 애순이 시설을 찾아다니는 과정에 고스란히 재현됐습니다.”

시나리오를 완성한 후 투자사를 찾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투자사 관계자들은 “장애인 연기를 하려는 배우가 없을 것”“절대로 개봉까지 못 간다”며 말렸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투자사를 만나 영화가 만들어지고 개봉된 일 자체가 모두 기적 같다”고 했다. 그가 감사하게 여기는 일이 또 있다. 비록 신예감독이지만 시나리오나 콘티 부분에 투자사가 전혀 개입하지 않고 감독에게 자율권을 준 것이다.

두 배우의 연기 호흡이 빛난다. 아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조영준 감독. ‘채비’는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 [사진 오퍼스픽처스]

두 배우의 연기 호흡이 빛난다. 아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조영준 감독. ‘채비’는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 [사진 오퍼스픽처스]

장애인 캐릭터를 묘사한 원칙이 있었다고.
“‘장애인을 희화화하거나 미화하지는 말자’고 했다. 장애인을 극영화에 담는 일은 정말 두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주변에선 ‘당신이 아무리 마음을 다해 찍어도 욕을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편집 과정에서 더 많이 웃기고 더 슬픈 장면일수록 덜어냈다. 영화에서 ‘자극’과 ‘쾌감’ 수위를 높이려면 아무래도 ‘사디즘적’인 방식을 쓰게 된다. 고난을 더 만들고 악당을 등장시켜 캐릭터나 배우를 괴롭히게 된다. 하지만 영화 속 인규에게는 이미 장애가 있고, 어머니 애순은 죽음을 앞두고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지 않나. 두 사람을 더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고두심, 김성균 배우와의 작업은 어땠나.
“두 배우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고두심 선생님은 사람 죽이고, 건물 부수는 ‘쎈 영화’가 많은데 신인 감독이 이런 영화 해도 괜찮겠냐며 걱정하셨다. 김성균씨는 ‘아내가 시나리오를 보고 펑펑 울었다’며 출연 결정을 알려왔다. 김성균씨는 장애인 관련 동영상을 많이 보며 정말 많이 연구해왔다. 두 분께 정말 많은 빚을 졌다.”
대본 리딩이나 촬영 중에도 울었다던데.
“많이 울었다. 애순이 아들 인규를 지인의 장례식장에 데려가 ‘인규야 엄마도 죽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오케이’ 사인을 내며 목이 멨다. 고두심 선생님이 저보고 ‘주책바가지’라고 하더라(웃음). 나중에 알고 보니 현장의 스크립터도, 현장편집자도 다 울었다.”
보고 나니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더라. 모든 자식과 부모는 언젠가 이별을 경험한다.
“그게 바로 하고 싶었던 얘기다. 우리 모두 언젠가 닥칠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 극 중 어머니 이름 애순은 우리 어머니, 누나 문경은 우리 누나 이름이다. 나를 인규에 대입한 거다. 저희 어머니가 영화를 보고 하신 말씀이 가슴에 남는다. ‘누구에게나 이별은 슬플 수밖에 없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최고의 채비는 사랑’이라고.”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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