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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도···'광식이 동생 광태' 김주혁을 추억하며

중앙일보

입력

'광식이 동생 광태'

'광식이 동생 광태'

[매거진M] 10월 30일. 모두가 아끼고 사랑했던 배우 김주혁이 유명을 달리했다. 불의의 사고였다. 사석에서 몇 번 인사를 했을 뿐, 인연이라 할 만한 무언가가 있던 것도 아니지만 한참 기분이 먹먹했다.

한준희의 잡동사니 상영관 '광식이 동생 광태'

그의 연기를 좋아했다. 화면을 장악하는 연기만이 ‘좋은 연기’로 주목 받기 쉽지만 유연하고 진솔하게 연기하는 그의 캐릭터들엔 늘 배려가 묻어있었다. 상대 배우에 대한 배려, 연출자에 대한 배려, 관객에 대한 배려까지.

‘좋은 사람이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 이 명제는 참일까? 어쩜 점점 빈약해지고 있는 이 명제의 근거로 많은 이들이 김주혁이란 배우를 떠올렸을 거다. 그래서 서두에 언급했듯 모두가 아끼고 사랑했던 것일 테고.

'광식이 동생 광태'

'광식이 동생 광태'

그의 필모그래피 중 좋아하는 작품을 꼽자면 한둘이 아니지만, 나에겐 ‘광식이 동생 광태’(2005)의 광식. 이 어설픈 남자가 역시나 가장 기억에 남는다. 광식은 소위 말하는 연애 숙맥이다. 좋아하는 상대가 있어도 제대로 고백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다른 사람이 생기면 ‘내가 그렇지 뭘’하며 움츠러들고 마는 그런 남자. 매번 그의 ‘연심’은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정말 깊이 사모했던 대학시절의 짝사랑 윤경(이요원)과도 그런 식이었다. 광식은 한심했고, 윤경은 눈치 채지 못했다. 비운이라고 말하기도 뭐한 비운. 그렇게 세월이 갔다. 그리고 둘은 7년이 지나고서야 지인의 결혼식에서 마주한다.

'광식이 동생 광태'

'광식이 동생 광태'

시간이 흐른 만큼 좀 능숙해 졌을 법도 하건만 여전히 광식에게 연애와 좋아하는 여자는 미지의 영역이다. 자신의 이름과 학번을 기억하는 윤경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광식. 윤경은 광식이 운영하는 사진관에 한번 놀러가겠다는 ‘하나마나 한 약속’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광식의 일상을 뒤집어 놓는다. 정말로 윤경이 올까? 아냐, 누가 봐도 그냥 한 말이잖아? 근데 그러다 진짜로 오면? 이 소심한 청년의 가슴이 다시금 뛰기 시작한다.

윤경은 맘에 없는 말을 쉽게 뱉는 사람이 아니었다. 혹은 광식의 염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윤경이 ‘정말로’ 사진관에 찾아온다. 하지만 웬걸. 광식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훨씬 더 적극적인 그의 조수(정경호)가 먼저 윤경에게 들이대기 시작한다. 아, 또 꼬이고 말았다. 역시 난 안 되는 것인가 싶은 광식의 처연한 표정….

'광식이 동생 광태'

'광식이 동생 광태'

자문해 봤다. 나는 왜 스무 편에 달하는 그의 영화 중 ‘광식이 동생 광태’의 배우 김주혁을 가장 크게 마음에 담아뒀을까? 어떤 장면 때문일까? 아님 어떤 대사 때문에? 아마,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켜쥐는 그의 어떤 얼굴들 때문이리라.

광식의 얼굴은, 광식의 표정은 당최 관객들에게 어떤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답답하다’는 기분보다 ‘그래, 저럴 수 있지. 나도 그랬는데 뭐’ 같은 감정이 먼저 선행한다. 왜? 광식이란 캐릭터는 자신의 불행에 대해 결코 불평하거나 남 탓하지 않는 인물이니까.

'광식이 동생 광태'

'광식이 동생 광태'

결국 어영부영 또다시 윤경을 놓쳤다.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윤경을 쫓아가는 광식. 이제 정말 마지막 기회다. 허나, 영화 ‘졸업’(1967,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엔딩처럼 멋지게 윤경에게 달려가 손을 잡고 줄행랑칠 걸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광식은 그런 인물이 아니다.

누굴 탓할 것도 없다. 본질은 아무 말 못한 나고, 그런 내가 바보인 거야라고 읊조리며 말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그 유명한 장면이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이 순간, 이 영화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정서가 실제 김주혁이란 연기자의 얼굴에 묘하게 겹치기 시작한다. 동시에 우리가 광식이란 인물의 등 뒤에 붙어 바싹 쫓아갈 수 있었던 연유도 알게 된다. 관객들을 ‘편하게’ 태우고 두 시간짜리 영화를 달려가게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얼굴. 그게 배우 김주혁의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광식이 동생 광태'

'광식이 동생 광태'

세월이 가도, 많은 이들이 결코 잊지 못하고 추억할 거다. 영화계의 좋은 선배이자, 좋은 동료이자, 좋은 친구였던 훌륭한 배우를. 김주혁 선배님이 그 곳에선 아무 근심 없이 편히 쉬시길. 지면을 빌어서나마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전한다.

글=한준희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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