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피해자 ‘비밀쉼터’에 가해자 난입...경찰 ‘수수방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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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가정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시설에 가해자가 난입했으나, 출동한 경찰은 이를 방관하기만 했다는 주장이 나와 파문이 예상된다.

가정폭력·성폭력·데이트폭력 등 여성폭력에 대한 상담과 피해자 쉼터를 운영하는 한국여성의전화는 9일 오전 자료를 통해 이같이 밝히며 경찰을 강력 규탄한다고 전했다.

사건은 지난 2일 발생했다. 한국여성의전화 부설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에 가해자가 침입해 단체 측은 경찰에 신고했으나, 출동한 경찰관은 가해자에게 격리 등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가해자가 아무런 '위해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단체 측은 "경찰서 여성청소년계 경찰관 두 명이 출동했으나, '자녀를 보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가해자의 요구를 수용하며 활동가들이 가해자를 직접 대면하여 설득할 것을 종용했다"며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들이 주거침입으로 인한 임의동행을 요청했으나 경찰은 '주거의 평온을 깨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서 단체 측은 "경찰은 기본적인 격리 조치도 하지 않아 피해자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는 거리에 가해자를 방치했다"며 "도리어 (경찰관이) 가해자에게 '보호시설 내의 피해자들이 빠져나가야 하니 이동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주장했다.

단체 측에 따르면 당시 경찰관은 "나도 자녀가 있는 아빠다", "(가해자는) 자녀만 보여주면 돌아갈 사람" 등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에 단체 측은"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및 가정폭력 사건에 대한 무지와 몰지각함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같은 보호 시설은 가해자에게 노출돼서는 안 된다.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여성가족부 운영지침 등에 따라 시설은 비공개로 운용된다. 가해자가 쉽게 위치 등을 파악해 피해자와 대면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단체 측은 "결국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들이 현수막으로 가해자의 시야를 차단하고, 차량을 통해 보호시설 내의 모든 입소자를 피신시켰다"며 "입소자들이 피신한 이후 가해자가 활동가들의 사진을 찍으며 모욕하는 동안에도 경찰은 가해자를 전혀 제지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주장했다.

서재인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시절장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가해자는 입소한 분(피해자)이 타인 명의의 카드를 사용한 것을 추적해 시설 근처에서 사용 기록이 있으니 잠복해 있다가 따라온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분들(피해자)이 쉼터에 오기까지는 목숨까지 위협받는 긴급한 상황에서 오게 된다. 그런 분들이 가해자와 만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이 안 되는 상황인데도 경찰은 가해자 입장을 두둔하고 '통화를 하게끔 해라', '아이들 보여주면 안 되느냐' 등 발언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해당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성적인 폭력을 비롯해 폭행, 경제적 폭력 등을 한 사람이라는 게 단체 측의 설명이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이날 오전 11시부터 경찰청 본청 앞에서 경찰 규탄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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