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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지긋지긋한 '꽃뱀' 프레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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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홍상지 기자 중앙일보 기자
홍상지 사회2부 기자

홍상지 사회2부 기자

뻔하디뻔하다. 지난 며칠간 한샘 성폭력 사건을 두고 벌어진 한국 사회의 양태를 보며 느낀 점이다. 피해 여성의 제보로 사건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입사하자마자 세 명에게 당한 여자’ 따위의 자극적 제목을 단 기사가 쏟아졌다. “남자가 나쁜 X이네!” 극렬한 여론 속에서 “상대방 이야기도 들어 보자”는 의견들이 고개를 들었다. 마침 가해자로 지목된 남자가 “서로 호감이 있는 사이였다”며 여자와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공개했다. 여론이 움직였다. “뭐야, 여자가 꽃뱀이었어?”

3년 전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2차 피해에 대해 취재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한 피해 여성은 “만약 친구가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신고하겠다고 한다면 도시락 싸 다니면서 말리겠다”고 했다. 조사부터 재판까지의 여정이 매우 지난한 데다 그 과정에서 상처받을 일투성이라는 이유였다. 그의 반문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막 교통사고 당한 사람한테 ‘다친 데 없니’라고 묻는 게 상식 아닌가요. ‘왜 하필 그 길로 갔어’ ‘그러길래 운전하지 말라고 했지’라고 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되레 책임을 묻는 듯한 질문이 먼저 따라붙기 일쑤예요. ‘왜 따라갔어’ ‘너도 호감이 조금 있었던 것 아니야’ ‘왜 더 저항하지 그랬어’ 같은 것들요. 그러다 조금이라도 석연찮은 점이 보이면 바로 ‘꽃뱀’이 되는 거예요.”

성폭력 사건에서 사람들은 유난히 ‘가해자 이입(移入)’을 많이 한다. 사건 특성상 뚜렷한 증거를 잡기 어렵다 보니 행여나 ‘생사람 잡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하다. 원래 둘이 ‘썸’ 타던 사이 아니었냐고? 연인 간에도 강제적인 성관계는 범죄다. 성폭행당한 이튿날 왜 바로 따지지 않았느냐고? 경황 있을 리 없는 여성은 당장 남성 직장상사를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망설였을 거다. 오히려 여자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어물쩍 넘어가려 한 건 남자 아니었나. 물론 사건의 사실관계는 더 밝혀 봐야 한다. 다만 그 전에 뻔한 가해자 이입에서 좀 벗어나 보자는 거다.

그나마 한샘 사건 이후 불매운동과 재수사 청원이 들끓고, 외국처럼 비슷한 상황의 ‘미투(Me Too)’ 제보가 잇따르는 걸 위안 삼아야 할까. 기사를 보다 ‘꽃뱀 살기 참 좋은 세상’이라는 댓글에 또 한번 좌절한다. 내 생각은 반대다. 억만금이 주어지지 않는 한 이 모든 걸 감당하면서까지 꽃뱀 노릇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사회가 규정지어 놓은 ‘성폭력 피해자’상과 다르다는 이유로 ‘꽃뱀’으로 오해받고 있을지 모를 진짜 피해자들이 걱정이다.

홍상지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