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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경제는 명령으로 안 돼 … 한국 최대 경쟁 저해 사범은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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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정재 칼럼니스트가 만난 사람 

김인호 한국무역협회장이 지난달 사임 이후 처음으로 허심탄회하게 소회를 밝혔다. 그는 ’기업과 국가의 이해관계가 맞아 함께 가는 기업가형 국가만이 발전하는 국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 무역협회]

김인호 한국무역협회장이 지난달 사임 이후 처음으로 허심탄회하게 소회를 밝혔다. 그는 ’기업과 국가의 이해관계가 맞아 함께 가는 기업가형 국가만이 발전하는 국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 무역협회]

김인호(75) 한국무역협회장은 ‘말이 거칠다’고 알려져 있다. 돌려 말하지 못하는 직설화법 때문이란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는 지난달 24일 전격 사임 발표를 했다. 기자들을 불러 “정부가 사임을 권고했다”고 말했다. 파장이 컸다. 그는 “거창하게 간담회까지 한 건 사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서다”고 말했다. 그런 그도 ‘누가, 어떻게 사임을 권했느냐’는 질문엔 조심스러워 했다. 인터뷰 중간중간 그는 “인사 문제는 가능한 한 언급을 말아 달라”고 몇 차례나 당부했다. 지난 2일 무역협회 회장실에서 김 회장은 사퇴 파문 이후 처음으로 언론에 입을 열었다.

전격 사의 속내 밝힌 김인호 무협회장 #무역협회는 엄연히 민간 경제단체 #과거 정부가 인사권 없지만 간섭 #이 정부는 그런 거 하지 말자더니 … #한·미 FTA, 일리 있는 것만 수용을 #우릴 도운 미국, 그런 적 없는 중국 #양다리 걸치면 중국이 우습게 볼 것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 뜻인가.
“(내가) 청와대 뜻이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무역협회장 인사를 대통령이 모르고 결정한 경우는 없다.”
누가 어떤 메시지를 전했나.
“우편배달부가 김씨냐, 이씨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전달자에게 두 가지를 분명히 밝혔다. 첫째로 내가 나갈 때 반드시 사임 이유를 밝히고 나가겠다. 둘째로 대통령에게 (나의 사임이) 보고됐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달라. 첫째는 내가 했고, 둘째는 끝내 안 해주더라.”

김 회장은 스스로를 ‘언필칭 시장주의자’라고 했다. 행정고시 4회 출신으로 전두환 정부 때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장을 비롯해  한국소비자보호원장·공정거래위원장, 김영삼 대통령 경제수석(장관급)을 지냈다. 정부와 기업을 보는 시각도 뚜렷하다. ‘기업에 좋은 게 국가에 좋고, 국가에 좋은 게 기업에도 좋다’는 ‘기업가형 국가’를 줄곧 말해 왔다. ‘기업보다 노동’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린 문재인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아 경질됐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사퇴 압력이 대단했나 보다.
“압력은 받는 사람이 위협을 느낄 때나 압력이 된다. 난 위협을 느낀 적이 없다. ‘선의의 권유’ 정도로 표현해 두자. 무협은 정부와 손발이 안 맞으면 일하기 어렵다. 바로 관둘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안 했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서다. 좀 더 투명하게 하고, 맞지 않는 제도와 현실은 고치자는 거다. 무역협회는 민간 경제단체다. 정부가 인사에 관여할 근거가 없다. 물론 과거 정부도 그렇게 했다. 이 정부는 그러나 그런 거 하지 말자는 정부 아닌가. 그래 놓고 이렇게 하면 되겠나.”

무협의 낙하산 인사 논란은 뿌리가 깊다. 70여 년 동안 17명의 회장이 거쳐 갔지만 기업인은 고 박용학 대농그룹 회장, 고 구평회 E1 명예회장,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등 3명뿐이다. 김 회장도 선임 당시 최경환 전 부총리와의 인연으로 낙하산 논란이 일었다.

김인호는 박근혜 정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어느 정부 사람도 아니다. 스스로는 ‘영원한 공인(公人)’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에도 싫은 소리를 많이 했다. 한 번은 대통령이 참석한 세미나에서 ‘기업 조사는 신중히 해야 한다. 별건 수사로 엮어 기어코 피를 보는 수사 관행은 고쳐야 한다’고 했다. 포스코·효성 등을 한창 조사할 때였다. 그랬더니 안종범 경제수석에게 전화가 왔다. 대통령이 ‘무역협회 회장님이 ○○기업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모르고 그런 말씀 하신 거 같으니 알려드리라’고 해 전화했다고 하더라. 경고장이었다.”

그는 노태우부터 문재인까지 7개 정부를 거치면서 늘 경제정책을 다루는 주요한 위치에 있었다. 명령도 해보고 통제도 해봤지만, 경제엔 자유시장과 경쟁만 한 게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우리나라 최대의 경쟁 저해 사범은 정부”라고 말했다. “정부 기능의 3분의 1이 경쟁을 제한하는 기능”이라며 “기업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적이 없다는 게 우리 정부의 문제”라는 말도 했다. 경쟁이나 시장보다 통제·배분을 말하는 문재인 정부의 방향에 그는 큰 틀에서 동의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두고 ‘좌파사회주의적이니, 뭐니’ 논란이 많다. 뭐가 가장 문제인가.
“기업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거다. 경제는 기업이 중심이다. 일자리·분배·복지 모든 걸 창출하는 주체가 기업이다. 나는 확신이 있다. 기업가형 국가여야 한다. 그런 나라만 발전할 수 있다. 기업가형 국가의 틀을 안 갖추고 잘된 나라가 하나라도 있으면 얘기해 보라.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도 경제만은 시장경제를 한다. 그렇게 안하면 경제가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작은 정부’로 가야 한다는 건가.
“정부의 크기는 상관없다. 정부가 하되 시장을 통해 하라는 거다. 기업을 살려가면서 하라는 거다. 정부 역할을 줄이라는 게 아니라 정부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는 거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반드시 안 해야 한다.”
경쟁이 해결책이란 말로 들린다.
“경제는 명령으로 안 된다. 1980년대 물가정책국장 시절 85개 품목의 가격을 하룻밤 새 다 정한 적이 있다. 명령으로 경제를 하던 시절, 물자가 부족한 시대라 가능했다. 그때도 ‘아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경쟁이 실력을 키우고 먹거리를 만든다. 영화시장을 개방하니 한국 영화에 경쟁력이 생겼다. 일자리도 늘었다. 반면에 농업이나 중소기업 정책을 보라. 지원·보호 수십 년 해줬지만 뭐가 달라졌나.”

그는 97년 외환위기 때 경제수석이었다.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위기에 대한 후각이 남달라졌다. 요즘 반도체 호황으로 수출이 잘되는 것을 그는 되레 걱정했다. “잘될 때가 위기다. 체질이나 경쟁력 향상 없이 수치만 좋게 나올 때야말로 굉장한 위기다. 내려갈 때가 됐다는 얘기다”고 했다.

어디서 돌파구를 찾아야 하나.
“제조업은 할 만큼 했다. 서비스업이 답인데 하나도 안 하고 있다. 교육·법률·마이스(MICE)·의료 등이다. 법률시장을 오픈하면 몇 년 후 우리나라 변호사들이 동남아 쪽을 다 석권하고 있을 거다. 우리 의료서비스 수준은 또 얼마나 뛰어난가. 메디컬센터가 활성화되면 당장 10만 명 고용은 문제없다. 중동·러시아·중국·동남아가 우리나라로 몰려올 거다. 그런데도 정부는 의료 민영화는 절대 안 된다고 한다. 그러려면 고용을 포기하겠다고 솔직히 말해야 한다. 서비스업을 묶어놓고는 고용을 늘릴 게 아무것도 없다. 공무원 늘려서 고용을 늘리겠다는 게 말이 되나.”

한국 경제를 오래 다루다 보면 필연코 외교·안보 그리고 정치와 만나게 된다. 그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 끼인 한국을 많이 걱정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것 중 일리 있는 것만 받아주면 된다”고 했다. 진짜 걱정은 협상 과정에서 벌어질 ‘반미 정서’라고 했다. 그는 “북한이 노리는 게 딱 그거다. 미국이 한국에서 손을 떼게 하는 것”이라며 “반미 정서가 이를 부추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미국”이라고 했다.

“미국은 이념적으로 같이 갈 나라고, 세계 최강의 국가이며, 그동안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준 나라다. 반면에 중국은 우리한테 아무것도 도움을 준 것이 없다. 지금처럼 양다리를 어정쩡하게 걸치면 중국이 오히려 우리를 우습게 볼 것이다.”

이정재 칼럼니스트
정리=이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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