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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한 명 남은 위안부 피해자 참혹한 증언 … 강요된 침묵의 장벽 깬 ‘아이 캔 스피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책으로 읽는 영화 - 아이 캔 스피크

한 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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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김숨 지음, 현대문학

“말을 하는 게 어디 쉽나? 더구나 50년, 60년, 70년을 넘게 숨기고 있던 이야기를.”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에서 열세 살에 영문도 모르고 만주 위안소로 끌려갔다 살아남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조차 말을 하지 못했다. 대략 20만 명이 끌려가 2만 명이 살아 돌아왔다고 알려졌지만,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는 고작 238명이다. 얼마나 많은 피해 생존자들이 자기가 위안부였음을 숨긴 채 살고 있었는지, 또 그렇게 생을 마감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들은 끝까지 말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았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왜 말을 할 수 없었는가? 그들이 겪은 일들이 차마 말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만은 아닐 터다. 그들의 침묵은 실상 강요된 침묵이었다. 성노예 피해자를 외려 기피하고 혐오한 한국사회의 낡고 이중적인 도덕적 규범의 시선이 그들의 말을 가로막았다.

배우 나문희가 주연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감독). [사진 리틀빅픽처스]

배우 나문희가 주연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감독). [사진 리틀빅픽처스]

추석 전 개봉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감독)는 그 강요된 수치와 침묵의 장애를 넘어 비로소 ‘말하는 존재’로 자기를 가시화하는 위안부 생존자의 투쟁을 보여준다. 과거를 숨기고 살아온 주인공 나옥분(나문희 분)이 마침내 자신이 피해자임을 증언한다. “아이 캔 스피크.”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아온 모든 장벽의 메타포로 읽힌다. 나옥분의 증언은 그 장벽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공적으로 등록하고 가시화하는 것이자 그를 통해 희생자의 인간적 존엄을 선언하는 행위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말하지 않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거꾸로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위안부 서사인 김숨의 소설 ‘한 명’이 환기하는 진실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은 세월이 흘러 생존해 계시는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뿐인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한 채 세상에 홀로 남은 미등록 피해 할머니인 ‘그녀’의 기억과 자취를 따라간다. ‘그녀’가 겪은 만주 위안소에서의 참상을 작가는 실제 증언록에서 발췌해 가져왔다. 허구를 압도하는 믿을 수 없는 그 참혹한 디테일은 차마 옮겨 적을 수 없을 정도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자기를 숨겨온 위안부 피해자들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말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끔찍한 폭력의 기억에 붙들려 있는 그녀의 가혹한 생애가, 자궁이 뒤틀려버린 그녀의 육체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고 증언하고 있었다는 것을.

김영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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