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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들이 기획한 재난훈련, 안내·대피·구조 “실전 같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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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쿠르릉, 쿠쿵. 지난달 31일 오후 2시 충북 보은 동광초등학교에 지진을 가정한 굉음이 울렸다. 상황실에 앉아있던 5학년 박규민(11)양이 다급히 마이크를 잡았다.

보은군 동광초 훈련현장 가보니 #5학년들 팀 나눠 학교 매뉴얼 수정 #평소 느꼈던 위험요소 꼼꼼히 기록 #지진경보 울리자 안전 유도팀 출동 #휠체어 탄 장애친구 보호까지 챙겨

“속리산 인근 지역에 규모 6.0 지진 발생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지진동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특히 동광초는 진앙지와 불과 10㎞밖에 되지 않아 직접 피해가 예상됩니다.”

지난달 31일 동광초교에서 열린 재난안전훈련에서 학생들이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달 31일 동광초교에서 열린 재난안전훈련에서 학생들이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박양이 안내멘트를 하자 강병훈(11)군은 안전유도를 맡은 친구 9명에게 층별 배치를 요청했다. 곧 사이렌이 울리며 경계경보가 발령됐다. 경광봉을 들고 형광색 안전조끼를 입은 임다인(11)양이 2층 2-4반 교실 앞으로 달렸다. 안전유도팀장인 임양은 “선생님들은 출입문을 확보하고 아이들을 책상 밑으로 신속하게 대피시켜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교실 안 학생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책상 속으로 몸을 숨겼다. 여진이 멈췄다는 안내가 들리자 다른 안전유도팀원들은 낙오된 학생들이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이날 훈련은 동광초 5학년 학생 44명이 직접 만든 재난대비 안전 매뉴얼을 시험하는 자리다. 지진화재 발생 등 재난 상황 가정한 시나리오 작성부터 상황전파·질서유지·안전유도·응급구조·화재진압팀 등의 역할, 재난 안전 대피지도 제작까지 학생들이 주도했다.

화재진압 역할을 맡은 학생들이 소방관을 도와 불을 끄고 있는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화재진압 역할을 맡은 학생들이 소방관을 도와 불을 끄고 있는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행정안전부와 교육부는 지난해 2개 학교를 선정해 ‘어린이 재난안전훈련’을 했다. 올해는 동광초를 포함, 전국 17개 시·도 별로 각 1개 초등학교가 선정돼 5주 과정으로 교육·훈련을 했다. 재난발생시 학생 스스로 안전을 확보하고 응급상황에 대비하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동광초는 지난 9월 25일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4주간 연습을 하고 이날 마지막 주차 교육으로 실제 훈련을 했다. 재난·안전·지진 관련 전문가와 소방·보건 관계자들이 지원단으로 활동했다.

계단으로 대피시키고 있는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계단으로 대피시키고 있는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재난 대피 안전지도에는 아이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반영됐다. 빨간색 화살표로 동선이 그려져 있고 소화기, 소화전, 방화벽, 자동심장충격기(AED), 유도등 위치가 표시됐다. ‘5-3반 복도 소화기 옆 부분이 깨져 있어 발이 걸려 다칠 위험이 있음’, ‘급식실 우유 냉장고는 대피하는데 방해가 되니 유의할 것’, ‘화장실은 지진·화재발생 시 급수가 가능하나 바닥이 미끄러워 주의가 필요함’ 등의 메모도 첨부했다.

외부지원팀 학생들은 “컵라면과 물 등 구호물품을 보완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고, 안전유도팀은 “경보 효과를 발휘하려면 호루라기와 후레시를 잘 보이는 곳에 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곽은호(11)군은 “기존 대피 매뉴얼은 몸이 불편한 친구들을 고려하지 않아 휠체어를 타거나 지체장애가 있는 학생들에게 적용이 어려웠다”며 “신속한 대피가 어려운 학생들은 담당 선생님을 지정해 안전모를 씌우고 팔로 끌어안아 심리적 안정을 취하게 해주는 것을 매뉴얼에 포함했다”고 말했다. 우혜정(11)양은 “선생님들께서 훈련을 지도할 땐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수동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며 “이제는 소화기 위치와 대피로, 친구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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