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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리셋 코리아

국회가 제 머리 못 깎는 선거법에 공론조사 도입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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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선거법 개정하려면

문재인 대통령이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일시 중단하고 공사 재개 여부를 공론조사에 맡기자고 제안해 시작된 원전 논란은 일단 마무리됐다. 공론화위원회가 내놓은 ‘건설 재개’ 결론에 모두가 승복했다. 불만의 목소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공사 중단을 요구해 온 환경단체에서도 ‘결과를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성명이 나왔다. 정부는 신속하게 공사 재개 권고안을 수용했다.

리셋 코리아 시민정치분과 제안 #갈등 해소 새 길 만든 공론조사 #다른 갈등 현안에도 도입할 만 #공론조사 대상과 조건에 대한 #꼼꼼한 법률 제정할 필요 있어

갈등 해소와 시민 참여의 새 길을 열었다는 긍정적 평가가 많다. 무엇보다 낯선 제도라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첨예한 갈등이 예고된 사안임에도 다수 안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정부가 대선 공약이라며 공사 중단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거나 아니면 국회 논의로 넘어가 공사 재개 결정이 나왔다면 모두가 결과를 수긍하는 분위기가 됐을지는 의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론조사가 검찰·경찰 개혁과 교육 개혁은 물론 증세, 사용후 핵연료 처리 방안 등 현안을 푸는 새로운 갈등 관리 모델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각국의 시민의회 구성

각국의 시민의회 구성

하지만 정부와 국회가 정치·사회적 이슈에 답을 내지 못하고 직접민주주의라는 명목으로 시민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건 대의민주주의를 흔드는 것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국민이 선출한 대표기관인 국회의원들이 여론을 수렴하고 국회 내 토론을 거쳐 책임 있게 나랏일을 처리하라는 게 우리 헌법이 채택한 대의민주주의다. 공론조사를 통한 사회 갈등 해결 자체가 우리의 대의민주주의가 그만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인 데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한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대의정치 측면에서 보면 탈원전 정책은 국회와 정부가 함께 논의하고 전문가 자문을 통해 결정해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격한 충돌만 이어질 뿐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갈등 현안을 푸는 데 시민들의 숙의에 기반한 공론조사가 통했다는 점도 확인됐다.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공론조사 방식을 활용하자는 주장은 여기서 나온다. 특히 정당이나 의회의 나태와 무책임, 비능률과 집단 이기주의 등을 보면 제도 보완은 절실한 과제일 수 있다.

중앙일보·JTBC의 국가 개혁 프로젝트 ‘리셋 코리아’ 시민정치분과는 ‘첨예한 갈등 해결에 유용한 방법론임이 확인된 이상 다른 갈등 현안들에 대해서도 공론조사 방식을 적극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 개인의 견해와 욕구가 다양해지고 이해관계는 그만큼 첨예하게 부딪힐 수밖에 없다. 공론조사가 시민의 국정 참여라는 성숙한 민주주의의 길로 이끌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다는 결론이다.

다만 공론화 과정은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데 그쳐야 하고 제한적이어야 한다. 정파적 이해를 떠나 주권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사안을 인식하고 진지한 논의를 거쳐 찬반을 결정하거나 대안을 내놓는다는 취지는 좋지만 국정 현안마다 그 방법을 택할 수는 없다. 긴급을 요하는 사안까지 정략적 판단으로 숙의에 맡기는 건 곤란하다. 진행 중인 공사를 3개월씩이나 중단시키는 식의 숙의정치도 위험하다. 특히 여론 지지율이 높은 정부일수록 대의기구의 역할을 줄이고 이들의 역할을 늘리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사회적 파장이 큰 쟁점·현안의 운명을 시민 손에 맡기는 건 정치적 책임 주체가 불분명해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전문 지식이 필요한 영역을 다수결로 결정하는 게 옳은지 여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나랏일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국회와 정부에 있고 공론화위원회는 법적 책임성의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런 만큼 참여정치가 의회의 권한이나 역할 기능을 과도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위축시키는 건 위험하다.

게다가 어떤 결과가 나오든 숙의 결과에 따르겠다는 식이라면 무능·무책임 정부로 규정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대의민주정치가 바로 숙의 민주정치다. 국민 대표로 구성되는 대의기구가 진지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의를 거쳐 국정을 이끌게 한다는 데 대의민주제의 의의가 있다. 의원내각제뿐만 아니라 대통령제도 근본 취지에선 다를 바 없다. 그런 점에서 숙의민주주의가 제도로 정착하기 위해선 언제, 어떤 조건에서 공론화를 해야 하며 공론 결과엔 누가 책임을 질 것이냐에 대한 명확한 법적 규정이 필요하다.

미국이나 영국 등 북유럽 선진 민주국가에서 주요 정책에 공론조사와 같은 숙의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한 사례를 찾긴 어렵다. 모든 민주제도는 법에 근거해 시행돼야 한다. 숙의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공론조사의 의제·방식·비용 부담에 대한 원칙을 법제화한 뒤 시행해야 한다. 공론화위원회의 법적 요건을 갖춰 정당성과 책임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권과 전체 시민의 공론화에 기여하는 진전된 공론화 모델로 발전시켜야 할 숙제가 남는다. 당장은 공론화 작업이 우선이다.

리셋 코리아 시민정치분과 위원들의 제안

리셋 코리아 시민정치분과 위원들의 제안

문 대통령은 “국가적 갈등 과제를 소수 전문가가 결정하고 추진하기보다 시민들이 공론의 장에 직접 참여해 도출된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 “이번 공론화 경험을 통해 사회적 갈등 현안을 해결하는 다양한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이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물론 모든 갈등 사안을 공론화에 부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청와대 역시 ‘국가가 갈등의 당사자가 되는 것에 한해 제한적으로 적용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런 조건에서 따져 보면 국회가 스스로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선거제도와 행정부가 제 머리를 깎을 수 없는 지방자치 분야에 시민 숙의를 도입해 볼 만하다. 공론화가 제도적으로 정착되면 기존의 정파적 다툼만으론 해결할 수 없던 문제가 일반 국민 입장에서 따져 보니 해결할 수 있더라는 효능감·성공감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갈등이 첨예한 정파적 문제여서 기존의 정치가 기존의 방식으론 풀어내지 못하는 선거법이 대표 사례가 될 수 있다. 개헌 역시 이 범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너무 크고 복잡해 결정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단점이 있다.

참여정치 혹은 숙의민주주의라는 건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실망 혹은 불신에서 비롯됐다. 현실에서 직접 민주정치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보완할 수는 있다. 대의민주주의는 결정 과정의 수단을 이야기하지만 참여민주주의는 그런 결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과정 자체를 통해 시민들의 민주의식이 성장해 간다는 걸 생각하면 공론화 과정은 단지 갈등 이슈에 대한 결정이 효과적이었느냐를 뛰어넘는다. 숙의 결과를 국회 토론에 부친다면 입법권을 훼손하거나 부인하는 문제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최상연 논설위원, 김아현 인턴기자 chois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