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르포]초등생 44명이 직접 기획한 재난안전훈련 현장 가보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31일 오후 2시 충북 보은군 보은읍 동광초등학교에서 지진 발생 경계경보가 울리자 학생들이 책상에 몸을 숨기고 있다. 보은=프리랜서 김성태

31일 오후 2시 충북 보은군 보은읍 동광초등학교에서 지진 발생 경계경보가 울리자 학생들이 책상에 몸을 숨기고 있다. 보은=프리랜서 김성태

쿠르릉, 쿠쿵. 31일 오후 2시 충북 보은군 보은읍 동광초등학교에 지진을 가정한 굉음이 울렸다. 이 학교 상황실에 앉아있던 5학년 박규민(11)양이 다급히 마이크를 잡았다.

지진 경보 울리자 5학년 안전유도팀 층별 배치후 친구들 대피시켜 #동광초 5학년 학생들 팀 나눠 학교 재난대비 매뉴얼 고치고 대피 지도제작 #학교 시설 위험요소 꼼꼼히 기록…응급상황 대처 능력 높여

“속리산 인근 지역에 규모 6.0 지진 발생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지진동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특히 동광초의 경우 진앙지와 불과 10㎞ 밖에 되지 않아 직접적인 피해가 예상됩니다.”

박양이 안내멘트를 하자 강병훈(11)군은 안전유도를 맡은 친구 9명에게 층별 배치를 요청했다. 곧 사이렌이 울리며 경계경보가 발령됐다. 경광봉을 들고 형광색안전조끼를 입은 임다인(11)양이 2층 2-4반 교실 앞으로 재빠르게 달렸다.

안전유도팀장인 임양은 “선생님들은 출입문을 확보하고 아이들을 책상 밑으로 신속하게 대피시켜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교실 안 학생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책상 속으로 몸을 숨겼다. 다른 안전유도팀원들은 화장실에 남아있거나 교실에 낙오된 학생들이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동광초 안전유도팀 학생들이 지진 발생을 알리고 여진이 멈추자 운동장으로 대피하라고 외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동광초 안전유도팀 학생들이 지진 발생을 알리고 여진이 멈추자 운동장으로 대피하라고 외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이날 훈련은 동광초 5학년 학생 44명이 직접 만든 재난대비 안전 매뉴얼을 시험하는 자리다. 지진·화재 발생 등 재난 상황 가정한 시나리오 작성부터 상황전파·질서유지·안전유도·응급구조·화재진압팀 등의 역할, 재난 안전 대피지도 제작까지 학생들이 주도했다.

행정안전부와 교육부는 지난해 2개 학교를 선정해 ‘어린이 재난안전훈련’을 했다. 올해는 동광초를 포함, 전국 17개 시·도별로 각 1개 초등학교가 선정돼 5주 과정으로 교육·훈련을 했다. 재난발생시 학생 스스로 안전을 확보하고 응급상황에 대비하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학교 현장에 맞는 매뉴얼을 만들고 재난대피 안전지도를 직접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동광초의 경우 재난 대피 안전지도제작과 구조분야에서 학생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반영됐다. 아이들이 만든 대피지도에는 빨간색 화살표로 이동동선이 그려져 있고 소화기, 소화전, 방화벽, 자동심장충격기(AED), 유도등 위치가 표시됐다.
‘5-3반 복도 소화기 옆 부분이 깨져 있어 발이 걸려 다칠 위험이 있음’, ‘급식실 우유 냉장고는 대피하는데 방해가 되니 유의할 것’, ‘화장실은 지진·화재발생 시 급수가 가능하나 바닥이 미끄러워 주의가 필요함’ 등의 메모도 첨부했다.

초등학생들이 직접 만든 매뉴얼로 실시된 '재난대응 안전한국 훈련'이 충북 보은 동광초등학교에서 열렸다. 프리랜서 김성태

초등학생들이 직접 만든 매뉴얼로 실시된 '재난대응 안전한국 훈련'이 충북 보은 동광초등학교에서 열렸다. 프리랜서 김성태

외부지원팀 학생들은 “컵라면과 물 등 구호물품을 보완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고, 안전유도팀은 “적은 인원으로 경보 효과를 발휘하려면 호루라기와 후레시를 보이기 쉬운 곳에 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학교 안전시설을 둘러본 뒤 “비상대피로에 야광등을 밝은 것으로 교체하자. 방화벽을 뗀 자리에 모서리가 튀어나와 있어 발에 걸릴 수 있으니 조치해 달라”는 등 건의가 있었다고 한다.

곽은호(11)군은 “기존 대피 매뉴얼은 몸이 불편한 친구들을 고려하지 않아 휠체어를 타거나 지체장애가 있는 학생들에게 적용이 어려웠다”며 “신속한 대피가 어려운 학생들은 담당 선생님을 지정해 안전모를 우선 씌우고 팔로 끌어안아 심리적 안정을 취하게 해주는 것을 매뉴얼에 포함했다”고 말했다.

동광초 화재진압팀 학생들이 소방관과 함께 화재 진압에 나서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동광초 화재진압팀 학생들이 소방관과 함께 화재 진압에 나서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동광초는 교육부 안전교육연구학교로 지정돼 지난해 지진·화재 대피훈련 2회, 불시대피훈련을 여러차례 해왔다. 기존 훈련은 교감을 안전책임관으로 교직원 40여 명이 중심이 됐다.
학생들이 스스로 훈련을 기획하고 임무가 부여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9월 25일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4주간 연습을 하고 이날 마지막 주차 교육으로 실제 훈련을 했다.

재난·안전·지진 관련 전문가와 소방·보건 관계자들이 지원단으로 활동했다.
훈련에 참여한 우혜정(11)양은 “선생님들께서 훈련을 지도할 땐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수동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며 “이제는 소화기 위치와 대피로, 친구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조성남 동광초 교사는 “학생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매뉴얼을 고치면서 스스로 재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됐다”고 말했다.

동광초 학생들이 만든 안전유도팀 재난 대응 매뉴얼. [사진 충북교육청]

동광초 학생들이 만든 안전유도팀 재난 대응 매뉴얼. [사진 충북교육청]

보은=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