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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조직은 범죄단체” … 대법, 조폭 간주 20년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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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대법원이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에게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한 하급심 판결이 적법하다는 판단을 처음으로 내렸다. 대법원 1부(김용덕 대법관)는 범죄단체조직 등 9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보이스피싱 총책 박모(46)씨 등 37명에게 징역 10개월~2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30일 밝혔다. 형법 114조에 규정돼 있는 범죄단체조직죄는 주로 조직폭력배들에게 적용된다.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그러한 단체에 가입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4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중범죄다.

범죄단체조직죄 적용 첫 판결 #“내부 역할 분담·위계질서 명확” #37명에 징역 10개월 ~ 20년 확정

박씨 등은 인천 등에 금융기관을 사칭한 콜센터 11곳을 두고 2014년 9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저신용등급자 3000여 명에게서 약 53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기소됐다. 이들은 “신용등급을 높여 고금리 대출을 저금리로 바꿔주겠다”고 속여 대포통장으로 대출금을 받은 뒤 연락을 끊는 수법 등을 사용했다.

검찰에 적발됐을 때 이 보이스피싱 조직은 78명 규모였다. 이사와 실장, 팀장, 상담원(조직원) 등의 수직적인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검찰이 총책 박씨에게 사기죄와 함께 범죄단체조직·활동죄를 적용한 이유다. 자금관리책 최모(33)씨와 중간 간부 조직원 55명에게는 범죄단체 가입·활동죄가 적용됐다. 실적에 따라 급여를 받는 상담원인 나머지 조직원들은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1심 법원은 박씨에게 징역 20년과 추징금 19억5000만원을, 최씨에게는 징역 10년과 추징금 1억500만원을 선고했다. 또 범죄단체 가입·활동죄가 적용된 조직원들에게는 징역 2~10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피고인들이 항소했고, 2심 법원은 형량과 추징 금액을 약간 조정하면서 적용된 혐의에 대한 유죄 판단은 그대로 유지했다. 대법원은 이날 원심 판단에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형을 확정했다.

그동안 수사기관은 보이스피싱 범죄자를 사기나 범죄수익 은닉죄,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으로 처벌해 왔다. 형법상 사기죄의 법정형은 10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재산상 이익이 5억원 이상일 때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가법)이 적용돼 법정형(3년 이상의 징역)이 높아진다.

법원의 판단은 이렇다. 1심 법원은 “보이스피싱이라는 사기 범죄를 목적으로 구성된 특정 다수인의 결합체로서 총책 박씨를 중심으로 단체의 내부 질서가 유지되고, 단체 내부에 역할분담과 위계질서가 명확하게 갖춰져 있다.

따라서 통솔 체계를 갖춘 형법상 범죄단체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마치 중소기업과 유사할 정도로 체계가 잡혀 있었고 매우 조직적·체계적으로 역할을 분담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항소심을 맡았던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이재영)는 “비록 폭력범죄단체에서 볼 수 있는 강령이라고 볼 만한 명시적인 내부 규정은 없었지만 범죄단체는 다양한 형태로 성립·존속할 수 있고 정형을 요하지 않으므로 구성이나 가입에 있어 반드시 단체의 강령이 명확하게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법원의 이런 판단은 최근 범죄 형태와 규모가 기업 형태를 띠고 있는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수사기관에서도 폭력단체가 아닌 조직적 범죄에 대해 범죄단체조직 혐의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 6월 경기도 고양경찰서는 경기도 고양시 등에서 마사지 업소를 운영하면서 성매매를 알선해 13억원을 챙긴 일당에게 이 죄를 적용했다. 경찰 관계자는 “그동안 성매매 범죄에 대해선 벌금형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처음으로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해 더 엄중한 처벌을 받도록 했다”고 말했다. 대검찰청은 지난 3월 전국 조직폭력 범죄와 보이스피싱 범죄를 올해 ‘2대 중점 척결대상 조직범죄’로 정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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