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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붓한 달빛 머금은 메밀, 까탈스러워 갈면 빨리 먹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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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호 23면

[제철의 맛, 박찬일 주방장이 간다] 평창 봉평 메밀밭

박찬일 주방장(왼쪽)과 ‘메밀꽃 향기’의 대표 홍순권씨가 수확을 앞둔 메밀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경빈 기자

박찬일 주방장(왼쪽)과 ‘메밀꽃 향기’의 대표 홍순권씨가 수확을 앞둔 메밀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경빈 기자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열에 아주 약해 오래되면 품질 뚝 #햇메밀 갓 갈아 먹으면 최상의 맛 #이효석 축제 때보다 지금이 제철 #돈 안되는 작목, 무·배추의 10% #경관상품이라 주민 심리적 부담 #30%는 제주서, 강원도는 10% 생산 #60일 만에 자라 벼 대체작물 최적

이 문장은 너무도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일본 문학을 빛낸 단 하나의 문장. 심지어 소설 『설국』을 읽지 않은 이도 이 글귀는 기억한다. 그럼 이건 어떤가.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정말로 ‘숨이 막힐 듯한’ 탐미적 묘사다. 이효석(1907~42)은 이 문장 하나로 완벽하다. 노벨상은 가와바타만 받았지만. 절대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다.

이 문장의 아름다움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는 지금도 저 대목을 읽으면 문장을 잉태한 작가의 힘을 새삼 대단하게 느끼게 된다.

‘메밀꽃 향기’의 메밀묵과 막국수. 붉은색 나물은 메밀순이다. 김경빈 기자

‘메밀꽃 향기’의 메밀묵과 막국수. 붉은색 나물은 메밀순이다. 김경빈 기자

이효석은 빼어난 소설을 남겼고, 동시에 그의 고향 평창에 선물도 안겼다. 그의 소설 한 줄로 시작된 관광사업이 크게 히트쳤다. 그저,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평창이 시쳇말로 떴고, 겨울올림픽을 치른 후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곳이 이효석 선생 생가입니다. 제 증조부가 선생의 부친에게서 사들였지요. 지금도 제 노모가 살고 있어요.”

붉은색 나물이 메밀순. 김경빈 기자

붉은색 나물이 메밀순. 김경빈 기자

토박이인 홍순권(40)씨의 말이다. 그의 집안은 이 생가 앞뒤로 메밀꽃 필 무렵, 메밀꽃 향기 등 국숫집 두 개를 열어 운영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효석 효과다. 맛있는 막국수와 메밀묵 등을 판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이효석 선생의 생가라고 부르는 곳은 두 개가 있다. 원래 이 생가가 오리지널이고, 아래쪽에 문학관을 크게 지으면서 관에서 생가를 고증 얻어 복원했다고 하는 집이 하나 더 있다. 어쨌든 사람들이 찾는 진짜 생가는 바로 여기다(평창군 봉평면 이효석길 33-11). 앞에 큰길이 없을 때도 국문과 교수들과 학생들이 몇㎞를 걸어서 생가를 보기 위해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에게 국수를 삶아내다가 결국 식당도 차리게 되었다.

이효석과 더불어 요즘 인기 하늘 찔러

하얀 메밀꽃이 떨어진 자리에 통메밀이 달려 있다. 김경빈 기자

하얀 메밀꽃이 떨어진 자리에 통메밀이 달려 있다. 김경빈 기자

이효석은 공부도 많이 했지만 박복한 운명이었다. 아내와 어린 아기를 잃고 서른여섯 살에 요절했다. 메밀의 운명도 그랬다. 한때 전국의 입들을 먹여 살렸는데, 별로 심지 않는 작물이 되었다. 이효석의 성가가 되살아난 것처럼 희한하게도 요즘 메밀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냉면과 막국수에 메밀 함량을 따지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메밀 소요를 대는 양의 다수가 수입산이라 국산 메밀을 찾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흥미로운 건 강원도가 메밀의 메카처럼 알려져 있으나 생산량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국산의 10% 정도를 차지한다. 최대 생산지는 뜻밖에도 제주도가 30%를 넘고 그 다음으로는 전라도다. 원래 제주는 쌀농사가 안 되어 메밀을 많이 갈았다. 그래서 강원도 일대 제분소에 들어오는 상당량의 메밀이 외지산이다. 강원도산이 최고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이게 다 이효석의 소설에서 온 고정관념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효석=메밀=강원도’의 등식이 만들어진 셈이다. 소설 한 줄이 이 지역의 인문지리를 바꾸어 버렸다. 물론 요즘은 소설의 무대보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에 사람이 몰린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통메밀, 메밀쌀, 쓴메밀(위에서부터). 쓴메밀은 품종이 다른 메밀이다. 김경빈 기자

통메밀, 메밀쌀, 쓴메밀(위에서부터). 쓴메밀은 품종이 다른 메밀이다. 김경빈 기자

강원도, 특히 평창군은 메밀로 인기를 얻고 있으면서 동시에 심리적 압박을 느끼고 있다. “저희 평창 봉평은 메밀을 심고는 있는데, 실은 이게 부담이 됩니다. 경관작물이어서 꼭 심어야 하는 것이라.”

사정인즉슨 이렇다. 강원도는 이미 길이 좋아진 80년대 들어서 무와 배추를 많이 심어서 도시로 내다팔았다. 고랭지라 수확시기가 평지와 달라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1993년도 신문기사를 보면 강원도 농협에서 “명색이 메밀 본고장인데 실제 심지 않고 있으니 적극적으로 메밀을 생산하자”고 선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도 무·배추·감자보다 돈이 안되는 메밀을 많이 심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뜻밖의 전기를 가져온다. 바로 이효석 메밀꽃 축제다. 9월 초에 메밀꽃이 소설 대목처럼 흐드러질 때 관광객을 유치하자는 사업이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실제, 달밤에 ‘흐붓한’ 메밀꽃을 보자면 얼마나 환상적이겠는가. 여담인데 흥미롭게도 메밀꽃에서는 밤꽃 같은 정액 냄새가 난다.

“메밀을 관에서 많이 심으라고 독려하지요. 메밀을 수확해서 먹는 건 나중 문제고, 꽃이 잘 피어야 축제가 잘 되니까 말이지요.”

메밀밭의 위치에 따라 약간의 보조금도 나온다. 돈 되는 작물 대신 메밀을 심는 농민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대의가 있으니 잘 따르지만 쉬운 일도 아니다. 무배추감자를 하면 1억원을 할 수도 있는 땅에 메밀을 심으면 1000만원이 고작일 때가 많다.

메밀꽃을 축제에 맞춰 피워  내자면 무조건 8월 5일 전에 씨를 뿌려야 한다. 그런데 감자 같은 봄 작물을 심고 정비해서 다시 메밀 심자니 감자가 다 익기도 전에 거두어야 한다. 참 속사정에 애로가 많다.

“메밀은 수확량이 아주 적어요. 경관을 만들어야 해서 벌써 15년 이상 연작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즈음 일본선 ‘아다라시이 소바’ 한창  

이효석 생가에 놓인 옛날 물건들. 김경빈 기자

이효석 생가에 놓인 옛날 물건들. 김경빈 기자

메밀 알곡이 작고 힘이 떨어진다. 하나를 얻자니 손해도 생기는 법이다. 메밀은 한때 정말로 중요한 작물이었다. 1935년 신문에는 “호남에 유리걸식자가 늘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가뭄으로 논농사를 망친 것이다. 갈라진 논에 얼른 메밀을 대파(代播)하라고 정부에서 지시했다는 기사가 연이어 나온다. 메밀은 대파에 아주 적합하다. 논이 망가지면 벼를 베어 내고 메밀을 심어도 충분히 수확해서 먹을 수 있었다. 생육기간이 60일이면 되기 때문에 여름에 심어도 가을에 서리 내리기 전에 수확이 가능했다. 벼의 대체작물로 최선이었다. 당시 논이 부족한 산간지방은 주로 메밀을 일궜다는 기사도 나온다. 거칠고 추운 곳에서도 잘 자랐기 때문이다. 논이 적은 강원도가 막국수의 메카가 알려진 계기다.

당연한 말이지만 메밀의 제철은 이효석 축제 때가 아니다. 알곡이 익어서 추수하는 지금이다. 바로 햇메밀이 나온다. 일본에서는 이즈음, 도하 각 국수가게에 이런 안내문이 나붙는다. ‘아다라시이 소바 입하’

메밀을 반죽하는 모습. 김경빈 기자

메밀을 반죽하는 모습. 김경빈 기자

햇메밀이 나왔다는 소리다. 일본 메밀 애호가들은 이때를 기다린다. 메밀은 열에 아주 약하다. 오래 보관하면 품질이 나빠진다. 햇메밀이 유독 맛있는 이유다. 메밀이 열에 약한 건 취급에도 영향을 준다. 우선 수확한 통메밀 자체를 서늘하게 보관해야 한다. 껍질을 까면 녹색을 살짝 띤 하얀 메밀쌀이 나오는데 이미 이때 품질 저하가 시작된다. 다시 가루로 곱게 갈면 빨리 먹어야 한다. 열에 약하므로 제분 후 맛과 향이 급속도로 떨어진다. 일찌감치 가루로 만들어 주로 유통되는 우리나라는 메밀로 봐서는 합격점을 줄 수 없다. 그래서 몇몇 냉면집에서는 자체 제분시설을 갖추고 있다. 갓 갈아서 먹어야 맛이 좋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이 좋은 메밀을 먹을 수 있는 시기다. 왕년에 강원도는 화전민들이 수확한 메밀로 국수를 눌러먹던 시기가 바로 이맘때였다. 동치미가 익으면 더 좋으리라.

박찬일 글 쓰는 요리사라는 별칭이 있는 인물.
음식 칼럼을 오랫동안 써 왔다. 딱딱한 음식 글에 숨을 불어넣는 게 장기다. 청담동에서 요리사 커리어를 쌓았고, 지금은 서교동과 광화문에서 일한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재료로 서양 요리를 만드는 일을 국내 최초로 시도한 일로 업계에서 유명하다. 이 지면에서 상식을 비틀고 관습을 뒤집는 제철 재료와 음식이야기를 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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