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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상원의 포토버킷(6) 어릴 적 '보름달 속 비행기' 그린 일본 만화 보며 사진 작가 꿈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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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비결' 혹은 '성공의 방법'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1990년대 말 IMF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모든 분야에서 경쟁이 심해지고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생겨난 이후엔 더욱 그렇다.

창업 실패후 '비쥬얼 디렉터'로 재기한 정주영씨 #원하는 모든 사진 거의 촬영할 수 있는 실력 갖춰 #'즐기는 단계까지 노력하면서' 미치는 것이 중요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옛말이 있다. 가수 싸이는 그의 노래 '좋은 날이 올 거야'에서 "노력하는 놈은 즐기는 놈 절대 못 이겨, 즐기는 놈은 미친놈을 절대 못 이겨"라고 했다. 방송인 서장훈 씨는 "즐겨라, 즐기는 자를 못 따라간다"라는 말이 제일 싫다며 "최고의 결과를 위해서 전쟁이라 생각하며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라고 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비행기 사진작가 정주영 대표(37). [사진 이상원]

비행기를 기다리는 비행기 사진작가 정주영 대표(37). [사진 이상원]

분야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잘 알고, 즐기면서 미치는 단계까지 갈 수 있도록 필사의 노력을 다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에는 별 이견이 없다.

상식처럼 알고 있는 교훈일 수 있다. 문제는 알면서도 경험을 하고 시행착오를 하고 나서야 몸으로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비주얼 디렉터(visual director)로 활동하고 있는 던컴닷컴의 정주영 대표(37)가 걸어온 길이 바로 그렇다. 돈을 좇아서 시작한 창업은 좋지 않은 결과를 냈는데, 우연한 기회에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고는 미친 듯이 즐기며 노력해서 성공의 문을 열었다. 영화 같은 그의 스토리를 들어봤다.

좋아하는 비행기와 바이크 앞에 선 정주영 대표. [사진 이상원]

좋아하는 비행기와 바이크 앞에 선 정주영 대표. [사진 이상원]

대학졸업후 사진기자로 취직  

2000년대 초반 서울예대에서 사진을 전공한 정 대표는 재학 당시 카메라 관련 기술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휴학하고 군대를 먼저 다녀 온 후 복학하기 전에 디지털 카메라를 배우고 싶어 유명 카메라 회사에 취직을 했다.

이후 졸업을 하고 온라인미디어 회사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했다. 디지털카메라 덕분에 누구나 사진을 쉽게 찍을 수 있게 되었으니 한발 앞서가기 위해서는 '뉴미디어아트(new media art)'를 공부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미 졸업한 서울예대의 뉴미디어창작학과로 전공을 바꾸어 다시 입학한 정 대표는 학업과 함께 정부에서 청년들의 창업을 장려하기 위해 신설한 '청년창업사관학교'에 입교해 창업 준비에 나섰다. 한창 3D(입체) 산업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을 때 국가로부터 1억원 가까이 지원 받아 3D 촬영기계를 제조해 판매하는 회사를 차렸다.

창업 초기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질문을 받고 있는 정주영 대표. [사진 이상원]

창업 초기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질문을 받고 있는 정주영 대표. [사진 이상원]

창업 초기 청와대에 초대를 받는 등 잘나가는 듯 했으나 3D 관련 산업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면서 회사도 어려움에 빠졌다. 본업인 촬영기계 제조·판매는 제쳐두고 부업인 상업용 제품사진 촬영을 하면서 회사를 유지해 갈 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모 항공사에서 의뢰받은 비행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촬영에 몰입해 있는 정대표의 모습을 회사 직원이 몰래 한 장 찍어 건네 줬다. 이 사진을 보면서 정 대표는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정주영 대표의 인생을 바꿔 놓은 한 장의 사진. [사진 이상원]

정주영 대표의 인생을 바꿔 놓은 한 장의 사진. [사진 이상원]

문득 '비행기가 내가 찍을 수 있는 가장 큰 제품사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비행기 사진이 묘하게 자신을 잡아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 여러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사진 찍는 행위 자체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진짜 찍고 싶은 대상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라는 사실,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유행하는 사업을 하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이 될 것이라는 사실 등.

이때부터 미친 듯이 비행기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한 번 마음을 빼앗긴 비행기 사진은 빠져들수록 점점 더 큰 매력을 선물로 주었다. 처음에는 공항에 멈춰 있거나 공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만 찍었다. 나중에는 모 오토바이 회사에 시승용 오토바이를 빌려주면 도시 곳곳을 다니면서 오토바이 사진을 멋지게 찍어주겠다고 제안해, 오토바이 사진도 찍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 사진도 찍었다.

실시간으로 항공기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을 활용해 비행기가 지나가는 길에 미리 가 기다렸다가 찍었다.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만 찍다가 점점 구름이나 산, 꽃, 도시 건물 등을 배경으로 날고 있는 비행기를 기획해 찍었다.

실시간 항공기 위치 확인 앱 '플라이트레이더24' 화면. [사진 이상원]

실시간 항공기 위치 확인 앱 '플라이트레이더24' 화면. [사진 이상원]

정대표가 촬영한 비행기 사진들을 처음 보는 이들은 대개 그 안에 숨어 있는 작가로서의 노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냥 카메라 들고 여기 저기 다니다가 하늘에 비행기 지나가면 재빨리 셔터를 눌러서 찍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본인 스스로 지금부터 그런 식으로 비행기를 한 번 찍어보라고 하면 잠깐 생각해 보고 "아~! 와~!" 하며 그 어려움을 비로소 눈치챈다.

정주영 대표가 촬영한 자연과 도심 속 비행기 사진. [사진 이상원]

정주영 대표가 촬영한 자연과 도심 속 비행기 사진. [사진 이상원]

그의 PC에는 지금까지 촬영한 비행기 사진 수천만장이 저장되어 있다. 몇 테라바이트(1테라바이트는 1024 기가바이트) 분량이다. 경험이 쌓이면서 이제는 원하는 사진을 거의 촬영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고 하는 정대표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이 있냐고 물었다.

어릴 때 보았던 일본 야구만화 H2(아다치 미츠루 작)의 한 장면을 말해주었다. 주인공이 미국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고 밝힐 때 창밖 보름달 속으로 한 대의 비행기가 쏙 들어가 날아가는 장면이다.

어릴 적 보았던 만화에 나오는 '보름달 속 비행기' 장면. [사진 이상원]

어릴 적 보았던 만화에 나오는 '보름달 속 비행기' 장면. [사진 이상원]

정 대표는 당시 이 장면에서 '희망'을 느꼈다. 비행기 사진을 찍게 되면서부터 그는 꼭 이 장면의 '보름달 속 비행기'를 찍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지금까지 이 칼럼을 읽어온 독자들 중에 '그냥 보름날 카메라 들고 나가서 찍으면 되는 것 아냐?'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기를 바란다.

보름달은 1년에 열두 번만 뜨고 모든 보름날이 다 맑은 것은 아니다. 달의 고도와 그때 날아가는 비행기들의 항로를 잘 계산해서 찍어야 한다. 시행착오 속에 1년이 거의 지난 금년 초 시흥시 정왕동에서 드디어 보름달 속에 비행기를 쏙 넣은 사진을 촬영하는 데에 성공했다. 성공하고 보니 어린 날 만화에서 봤던 장면 속 '보름달 속 비행기'와 너무도 흡사한 분위기로 찍혀서 더욱 감격스러웠다.

정주영 대표가 처음으로 촬영에 성공한 '보름달 속 비행기' 사진. [사진 이상원]

정주영 대표가 처음으로 촬영에 성공한 '보름달 속 비행기' 사진. [사진 이상원]

사진 촬영은 기다림의 미학 


비행기 사진 촬영의 가장 큰 어려움인 동시에 매력은 바로 기다림이라고 한다. 특정 비행기 항로를 확인하고 원하는 구도의 높은 빌딩 아래 혹은 옥상에 올라가 기다린다. 촬영한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 멀리 있는 빌딩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비행기를 기다리거나 아예 지역을 옮긴다.

이제는 거의 마음먹은 대로 보름달 속에 비행기를 넣을 수 있게 되었다는 그이지만 금년에는 두 번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날씨가 받쳐주지 않을 때도 있고, 계산이 잘못 되었을 때도 있고, 비행기가 조금 빗나가 날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촬영이 너무도 즐겁다고 한다.

마음먹은 대로 촬영이 가능해진 보름달 속 비행기 사진. [사진 이상원]

마음먹은 대로 촬영이 가능해진 보름달 속 비행기 사진. [사진 이상원]

그의 비행기 사진을 좋아하는 팬들이 온오프라인에 많아지면서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있다. 비행기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제법 유명인이다. 얼마 전에는 모 라이프스타일 잡지에 크게 소개되기도 했다. 앞으로 책과 전시회 등을 통해 그 동안 촬영한 사진들을 을 소개할 계획이다.

삼남매의 아버지이기도 한 정 대표는 생계를 위해 오토바이 등 홍보자료를 위한 사진과 동영상 촬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돈을 좇으며 창업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그 마저 즐거운 마음으로 임한다.

정주영 대표가 촬영한 비행기 사진. [사진 이상원]

정주영 대표가 촬영한 비행기 사진. [사진 이상원]

비행기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면서 쌓은 경험과 깨달음이 그의 상업용 촬영의 수준 또한 높여줘 광고주들이 아주 좋아한다. 아직 '비주얼 디렉터'라는 직업이 생소하여 촬영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보수가 낮지만, "오토바이 찍어서 먹고 살고 취미로 비행기 찍으러 다닐 정도는 됩니다"라고 한다.

행복하냐는 질문에 "행복하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주변에 두고 더불어 살아야 공기가 바뀝니다. 돈은 따라오는 것이지 좇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는 정주영 대표를 보면서 '즐기는 단계까지 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하면서 미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실감이 갔다. 책과 전시회 등을 통해서 고생과 성공에 관한 더욱 생생한 스토리를 곧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상원 밤비노컴퍼니 대표 jycys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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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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