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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으로]‘나가타쵸 리버럴 실종사건’…설 곳 잃은 자유주의 정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9월 26일 저녁. 일본 정치 일번지인 나가타쵸(永田町)에 일본 정치사에 남을 폭탄 발언이 나왔다.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민진당 대표가 총선에서 희망의당으로 공천을 일원화하겠다고 밝힌 것. 제1야당이 자당 후보를 내지 않고 이제 막 결성된, 그것도 정치 이념도 전혀 다른 신당을 통해 후보를 내겠다는 건 자폭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일본 내에서 리버럴(자유주의) 의 명맥을 그나마 이어왔던 제1야당 민진당이 사실상 해체된 날이었다.

지난 5일 고이케 유리코 희망의당 대표와 마에하라 세이지 민진당 대표가 후보공천 논의를 마친 뒤 기자들 앞에서 회견을 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지난 5일 고이케 유리코 희망의당 대표와 마에하라 세이지 민진당 대표가 후보공천 논의를 마친 뒤 기자들 앞에서 회견을 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일본 정치에서 '리버럴'이란 통상 보수적인 자민당과 대립적 위치에 있는 정치적 색채를 의미해 왔다.
 특히 외교안보 측면에서 자위대와 미일동맹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주변 국가와의 협력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자민당과 대비된다. 일본 정치의 우경화가 심화하는 가운데 리버럴의 존재는 작지만 의미가 있었다.

◇'한지붕 세가족'...민진당 해체는 예견된 수순?

일본내 리버럴을 이해하기 위해선 민진당의 전신인 민주당의 역사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96년 민주당은 자민당과 사민당의 탈당 의원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졌다. 처음부터 리버럴과 보수세력이 한 배를 탄 조직이었다. 1998년 민정당, 신당우애, 민주개혁연합 등과 통합을 통해 세력을 늘렸고, 2003년 자유당이 합류했다.
2016년 민진당으로 당명을 바꿀 땐 민주, 유신, 무소속이 한지붕 세가족처럼 동거 중이었다. 같은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선거를 위해 당이 필요해 모인 집합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당내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 쉽지 않았다.
특히 당내 보수세력들은 당 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민진당은 헌법 개정 반대, 안보관련법 반대 등을 주장해왔는데, 아예 체질적으로 이와 맞지 않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이번에 희망의당 합류를 선언한 마에하라 세이지 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헌법 9조 개정, 집단적 자위권 행사도 찬성하는 입장이다. 일본 정치엘리트 양성소라 불리는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 출신에, 일본신당을 통해 처음 정계에 입문한 그는 민주당과 민진당에서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사실 몸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마에하라는 최근 트위터를 통해 “헌법개정에 대한 논의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다”는 심경을 밝혔다.
민진당 해체는 시간의 문제였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 7월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민진당은 127석중 겨우 5석을 건졌다.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가 이끄는 도민퍼스트의 밀려 제1야당으로서 체면을 구겼다. 이미 “민진당에선 더 이상 미래가 없다”며 탈당하는 의원이 나왔고, 일부는 고이케 신당으로 옮길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마에하라 대표가 당 해체를 공식화했다는 분석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2009년 민주당 정권 때 무능함이 치명적

리버럴계가 자민당을 대신할 세력으로 주목받던 때도 있었다. 2009년 8월 민주당은 자민당을 압도적인 의석차로 누르고 정권을 차지했다. 민주당은 480석 가운데 무려 308석을 확보해 일본 헌정 사상 단일 정당 최대 의석수로 여당이 됐다. 정당지지율은 47%를 넘었고, 내각 지지율도 72%에 달하는 수퍼 정당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당지지율은 고작 6, 7% 수준. 숫자가 한 자릿수로 내려온 지도 벌써 일년이 넘었다.
민주당 정권은 어땠나. 정권은 잡았지만 아마추어였다. 리먼 쇼크 이후 전 세계적으로 찾아온 경제위기에서 정부 리더십은 갈피를 못 잡았다. 야당인 자민당이 참의원에서 노골적으로 정부 정책에 발목을 잡은 탓도 있지만, 선거 전 내놓은 각종 복지공약을 지키지 못하고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후텐마(普天間) 미군 기지 이전을 둘러싼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의 약속 번복 등 민주당 정권이 허둥대던 상태에서 2011년 3.11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 때 간 나오토(菅直人) 내각이 보여준 총체적 무능함은 아직까지도 ‘민주당=무능’이라는 공식으로 통하고 있다.

5년간 계속되고 있는 자민당 독주하에서도 민주당은 대안으로서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반대만 하는 정당’으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자민당에 비해 조직이나 자금 측면에서 현저히 떨어지는 민주당은 선거에서 매번 초라한 성적표를 내며 ‘정치 열등생’으로 전락해버렸다.

정치의 우경화...민의의 왜곡된 반영

민진당의 해체로 인해 일본 정계의 우경화는 한층 심해졌다. 민진당 내 보수세력이 희망의당으로 옮겨 보수정당은 또 늘어났다. 반면 리버럴은 거의 설 곳을 잃었다. 공산당, 사회당은 좌파로 분류된다.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단체 소카가카이(創價學會)를 모태로 태어난 공명당은 이념적으로는 리버럴과 가깝지만 정작 20년 가까이 자민당과 끈끈한 연립을 유지하고 있다.
리버럴은 주변국과 우호관계 중시, 역사문제에 있어서 겸허함, 튼튼한 사회보장제도 등을 지향한다. 문제는 이런 리버럴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정치적 공간이 취약하다는 점이다. 이는 민의 왜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 헌법개정을 두고도, 여론조사에선 절반 이상이 ‘개헌 반대’로 나오지만, 정치권에는 개헌 찬성 세력이 훨씬 많다. 우치야마 유우(内山融) 도쿄대 교수는 “현재 일본 정치는 가장 치열하게 경쟁해야 할 중도좌파, 중도우파가 없고, 전반적으로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건전한 논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입헌민주당 에다노 유키오 대표가 14일 도쿄 신주쿠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입헌민주당 에다노 유키오 대표가 14일 도쿄 신주쿠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리버럴 명맥 '입헌민주당' 선전할까

일본 정치에서 리버럴은 이대로 자취를 감추게 될까. 민진당이 해체된 뒤론 에다노 유키오(枝野 幸男) 대표의 입헌민주당이 리버럴 정당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2011년 대지진 당시 관방장관을 맡아 잠도 못자고 초췌한 모습으로 일하는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목이 쉬어라 전국 연설을 다니는 지금의 에다노에게서 관방장관 에다노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유권자들도 많다.
입헌민주당은 지난 12일 총선을 열흘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45석이 예상됐다. 중의원 해산 직전 리버럴계 의석이 15석이었으니 3배로 늘어난 규모다. 민진당 해체 과정을 지켜본 리버럴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입헌민주당으로 표를 모아주고 있는 모양새다. 14일 도쿄 신주쿠에서 열린 에다노 대표의 거리 연설엔 1000명 넘는 시민이 몰려들었다.
이번 총선에서 입헌민주당은 비록 폭발적으로 의석수가 늘진 않겠지만, 아베 정권의 독주를 견제할만한 실력을 보여주느냐에 리버럴의 미래가 달려있다. 아사히신문 정치부장을 지낸 야쿠시지 가쓰유키(藥師寺克行)도요대 교수는 “전후 일본 정치에서 리버럴 세력은 취약했던 게 사실이다. 지금은 다만 북한 정세나 미 트럼프 정부의 등장 등으로 보수계가 더 힘을 받고있을 뿐이다. 시대가 변하면 다시 바뀔 수 있다” 고 말했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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