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약진속 연정협상 나선 메르켈의 우향우…“난민 연간 20만명만 수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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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우파 정당을 이끌면서 좌파의 정책까지 끌어안아 ‘실용적 중도주의’의 길을 걸어왔다는 평가를 받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번엔 ‘우향우’ 신호를 보내고 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치러진 총선에서 극우정당이 약진한 데다 연정 구성이라는 발등의 불을 끄는 게 급한 상황에서다.

집권연합 기사당과 협상서 반대하던 난민 상한 사실상 수용 #EU 국경 강화에도 동의…이민법 추진으로 이어질 전망 #'자메이카 연정' 첫 상대인 기사당의 요구 거부 어려운 상황 #녹색당은 난민 상한에 반대해 향후 논란 가능성 #4연임했지만 지지율 하락한 메르켈, 우클릭 딜레마 #

 기독민주당(CDU) 대표인 메르켈 총리가 현 정부에서 집권 연합을 구성 중인 기독사회당(CSU)의 호르스트 제호퍼 대표와 8일 밤까지 협상을 벌여 난민을 연간 20만 명까지 받아들이기로 의견 접근을 이뤘다고 AFP 등이 보도했다.

기사당은 2015년 메르켈 총리가 난민 포용 정책을 펴 100만 명 이상이 유입된 이후부터 지지율 하락을 우려해 연간 20만 명의 난민 상한선을 설정하자고 요구해왔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의 가치와 맞지 않는다"며 거부 의사를 밝혀왔다. 하지만 연정 협상의 첫 상대인 기사당과의 협상에서 ‘상한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뿐 기존의 주장을 철회한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유럽연합(EU) 국경을 강화하고, 향후 이민법 제정을 추진한다는 데에도 동의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20만 명에는 난민 신청자뿐 아니라 독일에 정착한 가족과 합류하러 오는 이들도 포함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오른쪽)과 기독사회당 호르스트 제호퍼 대표. [EPA=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오른쪽)과 기독사회당 호르스트 제호퍼 대표. [EPA=연합뉴스]

그동안 메르켈 총리는 "수용할 난민의 상한을 설정하는 건 정치적 망명자를 수용하도록 규정한 독일 헌법에 배치된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서 이번에 '연간 난민 20만명'을 기사당과 합의하면서도 '망명 신청자가 평가를 거치지 않고 국경에서 곧바로 추방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며, 2015년 처럼 전쟁을 피해 도움을 요청하는 난민이 대량 발생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생기면 의회의 동의를 거쳐 상한선을 높일 수 있다'는 장치를 마련했다. 또
숙련된 기술을 가진 노동 인력은 난민 상한과 무관하게 별도로 받아들이는 절차를 밟기로 했다.

메르켈 총리가 자신의 기조를 다소 유지하긴 했지만 그동안 강하게 반대해왔던 기사당의 상한 설정을 사실상 수용한 것은 총선을 거치며 드러난 민심 이반 때문이다.
이번 총선 결과 기민ㆍ기사연합은 246석을 차지해 2013년 총선 당시 311석에 비해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반면 2013년 창당한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12.6%를 얻어 94석을 거머쥐며 약진했다. 메르켈은 총선 직후 “극우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걱정에 귀 기울이고 다시 지지를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바이에른주가 정치적 거점인 기사당 역시 내년 주 선거를 앞두고 비상이 걸렸다. 쏟아져 들어온 난민에 대한 반감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해당 주에서 2차 대전 이후 줄곧 승리해온 기사당의 불안감이 커졌고, 제호퍼 대표에 대한 당내 사임 압박이 커지던 상황이었다.

2차 대전 이후 가장 낮은 지지율을 받은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이 연정 참여를 거부하면서 메르켈에게 집권 연정을 구성할 방안이 한 가지밖에 남지 않은 점도 ‘우클릭' 압박 요인이었다. 기사당 측은 메르켈에게 난민 정책 강화 등 10개 요구 조건을 내걸었는데, 메르켈로선 연정 협상의 첫 관문은 무조건 통과해야 하는 처지였다.

메르켈은 친기업 성향의 자유민주당(FDP)과 좌파 성향의 녹색당을 상대로 ‘자메이카 연정' 협상에 나설 예정이다. 기민ㆍ기사연합과 FDP, 녹생당의 상징색이 검정, 노랑, 초록으로 자메이카 국기의 색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사당과의 협상 타결로 연정 협상이 본격화하게 됐지만 자민당과 녹색당의 정책 지향점이 달라 향후 협상이 순조로울 지는 미지수다. 녹색당은 난민 상한 설정에 반대해 온데다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발전소 중단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나마 2015년 100만명 가까이 유입됐던 난민이 발칸 루트 등이 막히면서 지난해 28만 명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 메르켈의 정책 유턴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고 있다.
자메이카 연정 구성에 실패하면 메르켈은 총선을 다시 치르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선거 기류는 기성 양대 정당의 지지율 하락과 극우정당의 약진이었다. 4연임에 성공한 메르켈은 정부 구성 단계에서부터 딜레마를 뚫어야 하는 숙제를 풀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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