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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에 살다] (53) 알프스와 설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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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젊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 사랑도 명예도 젊은 목숨 걸기에는 너무 낮다/ 설악을 오르며 찾아냈다/ 목숨 걸 만한 단 하나의 이상을/ 그 이상 속으로 끝없이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세상으로 연결된 모든 길들이 사라진다/ 곧 나는 산이 된다'.

군복무를 마친 1976년 여름, 설악의 천화대를 단독등반할 때 쓴 유서다. 추락할 것 같은 불안감에 쫓겨 쓴 글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오히려 산에서의 죽음을 동경한 게 아닌가 싶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83년 여름, 알프스의 어느 벽 아래에 있는 산장에서 다른 대원들이 잠든 사이 나는 설악의 천화대에서 쓴 유서를 떠올렸다. 다시 유서를 쓰기 위해서였다.

그때 나는 연세대의 제2차 알프스 원정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드류 서벽과 마터호른.투르롱드 북벽 등을 등반하고 최종 목표인 그랑드 조라스 북벽에 목숨을 건 도전을 앞두고 있었다.

레쇼 산장을 떠나기에 앞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으로 우리는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를 끓이고 밥을 푸짐하게 지었다.

대원 중 막내인 김시영(현 가평요 대표)씨가 박내혁 대원의 밥그릇에 밥을 퍼담는 순간 파이브글라스로 만든 밥그릇이 '펑'하는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혀엉, 나 못 가겠어요."

죽더라도 그랑드 조라스에서 함께 죽자던 김대원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았다. 김대원에 이어 류중희(현 캐드랜드 상무)대원과 박대원도 등반에 나설 엄두를 못 냈다. 나는 대장으로서 철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샤모니에 있는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자 등반을 적극 지원했던 샤모니의 터줏대감 띠띠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대원들을 맞으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라디오 뉴스에서 들었는데 새벽에 그랑드 조라스에서 네명의 등반대원이 낙석사고로 숨졌다는 거야. 나는 그 희생자들이 자네들인 줄 알았지."

그랬던 것이다. 숨진 네명의 대원은 레쇼 산장에서 우리와 함께 대기했던 프랑스팀이었음이 분명했다. 우리 팀보다 하루 늦게 산장에 들어왔기 때문에 먼저 출발해도 좋다며 양보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등반을 포기하자 우리 팀의 예정 등반시각에 북벽을 오르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다.

"프랑스팀에는 미안하지만 이게 모두 설악의 산신령이 우리를 지켜준 것 아니겠습니까." 류대원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알프스의 산 속에서 노루목 기슭에 잠들어 있는 선후배들과 설악의 정상을 그리워하며 유서를 쓰는 대신 노래를 지었다.

'홀로 살아남은 슬픔 딛고 가기에/ 아직은 남은 삶이 무거워/ 발길 내디딜 때마다 영혼까지 따라 흔들거리더라도/ 산으로 가자 … 흔들리던 그리움이 따라 엎어져/ 홀로 살아남은 서러움이 먼저 일어나더라도/ 진정 외로운 영혼 챙겨, 산으로 가자/ 저 삼각 받침으로 제 목숨 세운 산, 설악산으로 가자'.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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