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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money)가 뭐길래]③ 학대 받은 사랑이와 엄마, 그리고 2000만원

중앙일보

입력

가족 간에도 돈은 민감한 문제다. 최근 논란이 된 가수 고(故) 김광석 씨 가족도 오랫동안 저작권 분쟁을 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아예 후견신탁을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돈 문제로 가족 간에 얼굴을 붉히느니, 차라리 전문 금융기관에 돈 관리를 맡기는 것이다. 치매를 앓는 부모님의 재산, 이혼한 엄마와 함께 살다 홀로 남은 아이의 상속 재산, 새 아빠에게 성추행당한 딸에게 남겨진 공탁금…애매한 돈 문제로 갈등을 겪다 해결점을 찾은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모아봤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학교 가지 말고 "동생 보라"는 엄마, 사랑이의 2000만원

올해 12살이 된 ‘사랑이(가명)’는 쉼터라고 불리는 아동보호 시설에서 산다. 낳아준 부모가 있지만, 어른이 될 때까지는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 사랑이 엄마는 사랑이를 낳고 사랑이 친아빠와 헤어졌다. 대신 새 아빠 김 모(42) 씨를 만나 함께 살기 시작했다. 덩달아 사랑이의 삶은 180도로 달라졌다. 엄마는 새 아빠와 사이에서 동생들을 낳은 뒤 사랑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했다. 대신 “어린 동생들을 돌보라”고 했다. 한 번은 학교로 사랑이를 찾아와 일부러 조퇴까지 시킨 뒤 동생들을 보게 했다. 새 아빠 김 씨는 엄마가 없는 틈을 타 사랑이 몸을 만지려 들었다. 사랑이가 며칠씩 학교에 가지 못하자, 아동학대를 의심한 이웃들이 지난 3월 경찰에 신고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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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새 아빠의 그늘에서 벗어날 것만 같았지만,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경찰은 사랑이의 엄마와 아빠 김 씨를 방임과 유기, 신체학대 혐의로 조사했다. 경찰 조사를 두려워하던 엄마는 사랑이와 동생들을 버리고 잠적했다. 사랑이는 동생들과 아동보호 시설인 쉼터에 가게 됐고,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올 초 사랑이를 성추행하고 학대한 혐의(아동복지법 위반)로 새 아빠 김 씨를 불구속기소 했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였던 김 씨는 손해배상금 조로 돈 2000만원을 법원에 공탁했다. 법에 따르면 가해자가 피해자의 피해 보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합의와 무관하게 일정 금액을 법원에 맡길 수 있다. 김씨는 감형을 받기 위해 이 제도를 이용한 것이다.

사랑이를 돕던 대한법률구조공단 전주지부의 임현주 변호사는 이 돈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미성년자인 사랑이의 친권자는 수사를 피해 잠적한 엄마다. 친권자는 언제든 법원에 공탁된 돈을 찾아갈 수 있다. 2000만원은 사랑이에게 중요한 돈이다.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할 수 있는 큰 금액은 아니지만,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 결국 임 변호사는 단지 부모라는 이유로 친권자인 엄마가 사랑이를 위해 씌여야 할 돈을 마음대로 빼가지 못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아동학대법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는 ‘법원이 친권자의 의사 표시에 갈음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법원이 엄마의 친권 행사를 정지하고, 엄마 대신 은행에 공탁금을 맡길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이었다. 김상곤 전주지방법원 판사는 사랑이의 공탁금을 KEB하나은행에 맡기도록 했다. 사랑이에게 긴급자금이 필요한 때를 제외하곤 사랑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부모 대신 은행이 돈을 관리하도록 묶어놓은 것이다. 법무법인 로고스의 배인구 변호사는 “부모로부터 학대받던 아이를 위해 쓰여야 할 돈을 법원이 가해자인 부모로부터 보호해준 첫 사례”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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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견신탁

후견(後見)이란 말 그대로 ‘뒤를 봐준다’는 뜻인다. 통상 미성년자 등의 보호자 역할을 대신하는 것을 말하지만, 성인도 치매 등의 질병이나 장애로 일상생활이 힘들 경우 재산관리와 신상보호 역할을 하는 후견인을 둘 수 있다.

국내에는 2013년 7월 1일 성년후견제가 도입됐다. 성년후견인 신청은 법원을 통해 할 수 있다. 법원은 배우자 또는 자녀, 제3자인 전문후견인 중에서 적합한 후견인을 정한다. 후견인은 대상자의 재산관리와 신상보호의 역할을 담당한다. 대법원에 따르면 2013년 637건이었던 후견 신청은 지난해 3209건으로 늘어났다.

우리보다 앞선 2000년 같은 제도를 도입한 일본에서는 후견인이 3억엔(약 30억원)을 빼돌리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2012년 후견신탁을 통해 후견제도를 보완했다. 후견신탁은 후견인이 담당하던 재산관리를 전문 은행에 맡겨 유용을 막는 제도다. 특정한 목적 외에는 돈이 쓰이지 않도록 설계(특정금융신탁)하면 후견인 또는 친인척이라 하더라도 인출이 불가능하다.

우리 법원 역시 최근 가족 간 분쟁을 줄이기 위해 후견신탁을 이용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로 부모를 잃은 A양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법원은 A양을 돌보던 고모를 임시후견인으로 정하고 보상금 등을 은행에 맡기도록 했다. 매월 A양의 생활비를 고모에게 지급하되, 신탁된 돈의 절반을 A양이 25세에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나머지 절반은 30세가 되야 은행에서 찾아쓸 수 있도록 설계했다. 법원은 최근에는 현금성 자산 외에 부동산까지 금융기관에 맡기도록 하고 있다.

후견신탁을 하려면 일반 성인은 금융기관과 직접 계약을 하면 된다. 반면 미성년자나 장애ㆍ질병 등으로 의사결정 능력이 떨어진 성인은 후견신탁을 하기 위해선 법정 후견인이 법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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