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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력근무법 시행 3년 … 영국 직장인 90% “9 to 5 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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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영국 디지털서비스 부처의 정책검증팀에서 일하는 커닝 암스트롱(37)은 런던 사무실에 월·화·수 3일만 출근한다. 목요일과 금요일 중 하루는 런던 외곽의 집에서 근무한다. 사무실에 원격 화상회의 장비 등이 잘 갖춰져 있는 데다 스마트폰이 있어 동료들과는 늘 연결돼 있다. 실시간 메신저 서비스와 e메일 등이 주 통로다. 암스트롱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하는 일자리는 구해 본 적이 없다”며 “영국 지방정부에서 9년 동안 일했을 때도 파트 타임처럼 자유롭게 일하는 형태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럼에도 다양한 프로젝트의 팀장까지 맡았는데, 유연하게 근무하더라도 조직이 지원해주고 내가 합당한 자세를 유지하면 어떤 역할도 해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26주 이상 일하면 탄력근무 요구권 #거부 땐 회사가 합당한 사유 밝혀야 #‘땡 출근, 땡 퇴근’ 사라지는 추세 #중앙정부 공무원도 주1일은 재택

네 살 이하 자녀 넷 둔 경단녀도 취직

자산상담가로 일하던 젬마 올리버(35)는 두 자녀를 키우려고 지난 2015년 직장을 그만뒀다. 그는 지난해 쌍둥이를 임신했다. 경력을 되살리고 싶었지만 4살 이하 자녀를 네 명이나 둔 여성을 고용할 회사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영국 중부 자산컨설팅업체 웰스 디자인이 그를 선임 자산상담가로 채용했다. 기존 팀에 여성 전문가를 투입할 필요가 있던 회사는 올리버에게 ‘탄력 근무제’(flexible working)를 제안했다.

출산 이후 쌍둥이가 5개월이 될 때까지 그는 일주일에 12시간만 사무실에 출근했다. 업무가 바빠지자 주 21시간까지 근무 시간을 늘렸다. 올리버는 “의무감으로 직장에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원했기 때문에 일할 때 정말 집중했다”고 시티와이어 기고에서 말했다. 그는 최근 연금과 자산 플래닝 과정을 공부하며 관련 자격증도 땄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h@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h@joongang.co.kr]

주 5일 회사 사무실로 출근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전통적인 근무 형태가 허물어지고 있다. 세계 각국의 정부 관련 기관과 기업 등에서 근로자들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골라 일하는 탄력근무제가 확산되고 있다.

영국은 아예 관련 법을 제정해 지난 2014년 6월부터 근로자가 고용주에게 탄력근무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거부하려면 회사 측은 합당한 사유를 밝혀야 한다. 영국이 규정한 탄력근무의 형태는 ▶두 사람이 한 직업을 나눠 하는 잡 셰어링 ▶재택 근무 ▶근무 일 수나 시간을 줄이는 파트 타임 ▶근무 시간 임의로 정하기 등 다양하다. 한 직장에서 26주 이상 일한 근로자라면 고용주에게 서면으로 이런 형태를 제안할 수 있다.

이런 제도가 생겨난 것은 선호하는 이들이 많아서다. 영국 직업컨설팅업체 타임와이스가 성인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나인 투 파이브’ 근무가 싫다는 응답이 90%에 달했다고 BBC가 보도했다. 탄력근무제는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여성들이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조사에선 남성 5명 중 4명도 전통적인 출퇴근 근무를 바꿔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거나 이미 그런 형태로 일한다고 밝혔다.

일주일에 며칠은 재택 근무를 하거나 시간당 임금을 정해놓고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방식, 또는 매일 근무 시간을 달리하는 방법 등을 희망했다. 미국에서도 지난해 기준으로 근로자의 43%가 유연하게 근무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는 등 세계적으로 이런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근로자들은 육아 부담이 갈수록 늘고 있으며, 학습이나 레저 기회를 더 갖고 싶다는 이유를 들었다. 최근에는 근무 형태를 바꾸면 업무 효율이 높아진다는 주장도 나온다.

기업은 운영비 줄고, 직원은 시간 아껴

영국 구직업체 마더스앤커리어의 설립자 아네트 블록랜드는 “땡 하면 출근했다가 땡 하면 퇴근하는 근무는 조만간 과거의 유물이 될 것”이라며 “기업들이 탄력근무를 제공할 때의 이점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블로그에서 말했다.

이런 변화는 언제 어디서나 연결되는 디지털 환경 덕분에 가능해졌다. 미국 기업 등에선 화상연결 화면과 바퀴가 달린 로봇이 사무실을 돌아다니는 등 ‘탈 사무실’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개발되고 있다.

회사 측은 대형 사무실을 유지하지 않아도 돼 비용을 아낄 수 있다. 직원들로선 장시간 출퇴근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줄어든다.

탄력근무제는 영국 최대 통신기업인 BT를 비롯해 통신회사 O2, 유니레버 같은 다국적 기업, 디자인과 컨설팅, 법률 회사, 금융권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확대되는 추세다. 2014년 영국 버진기업의 리차드 브랜슨 회장은 경영파트 직원들을 대상으로 “몇 시간이나 하루, 몇 주나 몇 개월이든지 원하는 시간에 휴가를 가라”고 말했다. “자신이 100% 편안하다고 느끼는 기간에 휴가 갈 테니 업무 공백도 생기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하지만 탄력근무가 무조건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영국에서도 연봉이 2만파운드 이하인 직장의 24%가 탄력근무를 허용한 반면, 3만5000~5만9000 파운드의 고연봉 자리는 8.9%에 불과하다는 조사가 나왔다. 영국 노동조합의 조사에선 저임금 노동자 1000명 가운데 이런 형태를 원했다가 근무 시간 감축이나 업무 이동, 실직 등을 경험한 비율이 20%에 달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탄력근무가 모든 직원에게 성과를 내도록 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를 원하는 직원들은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하고, 회사는 성과와 결과물로 평가를 하되 일을 어떻게 하는지는 따지지 않겠다는 자세로 신뢰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근무 형태를 다양화하지 않으면 영국 경제에 625억 파운드(약 95조원) 가량의 손실을 초래할 것이라고 구직 업계는 추산한다. 유능한 여성 인력 등을 사장시키기 때문이다.

근무 체제의 변화는 특히 18~35세 젊은층의 선호가 강하다. 영국 급여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페이사이클은 월요일 아침 회의만 참여하고 나면 나머지는 언제 얼마만큼 일할 지 알아서 정한다. 타임와이스의 카렌 매티슨 대표는 BBC 인터뷰에서 “유능한 인재 확보에 기업의 사활이 걸린 시대인 만큼 회사들이 근무를 유연하게 바꾸는 것은 필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성탁 런던 특파원 sunty@joongang.co.kr

※ 관련 기사 BBC Male employees want flexible work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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