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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안하면 끝이겠구나" 무대로 돌아오는 피아니스트 백혜선

중앙일보

입력

베토벤 연주로 국내 무대 복귀를 선언하는 피아니스트 백혜선. [사진 크레디아]

베토벤 연주로 국내 무대 복귀를 선언하는 피아니스트 백혜선. [사진 크레디아]

“서울대도 그렇게 그만뒀거든요. 이 일이 나를 위한 건가, 학생들을 위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고 누구도 발전하는 거 같지 않아서요.” 미국에서 전화를 받은 피아니스트 백혜선(52)은 지금 다시 그때의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차이콥스키,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 등 스타 피아니스트 #"꼭 큰 무대에서 나를 증명해야 하나 회의감 들었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 등 장대한 프로그램으로 무대 복귀 선언

백혜선은 젊은 스타 피아니스트였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 EMI와 인터내셔널 음반 최초 발매 등 화려한 경력을 일궜다. 30세에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임용됐던 백혜선이 10년 만에 사직서를 낸 일은 화제가 됐다.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 후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한국의 큰 공연장에서 음악회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그렇게까지 굳이 나를 증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좋은 젊은 피아니스트가 저렇게 많은데. 나는 충분히 했는데.” 연주 제의가 들어오면 마다하진 않았지만 의미를 두고 무대를 기획하고 만들어서까지 공연하진 않았다. “창피할 정도로 연주에는 한쪽 발만 담그고 살았던 시기”라고 했다. 2013년부터 클리블랜드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본인 연주에 집중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어요. 지금 놓으면 여기서 끝이겠구나. 그냥 가게 되겠구나. 결단하고 달리는 차에 올라탈 때가 지금이구나.” 2005년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하게 한 위기감 비슷한 감정이 다시 한번 왔다. “나이가 들었잖아요. 인생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게 이제는 절절하게 체감이 되고요. 내 자신을 닦아나가지 않으면 인생이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특히 미국 유학 시절부터 배웠던 스승의 영향이 컸다. “87세인 러셀 셔먼 선생님의 슈베르트 연주를 보고 왔는데 2주 후에 또 연주가 있으시다네요.” 정확하고 강하며 화려한 연주로 대표됐던 백혜선은 이제 “누구에게 보이는 것보다 스스로 성장하는 의미에서 음악을 공부한다”고 말했다.

그가 ‘달리는 차에 올라타는 일’로 비유한 것은 베토벤 연구와 연주다. 이달 독주회에서 선보이는 베토벤의 ‘디아벨리 왈츠에 의한 33개 변주곡’으로 시작해 내년에는 베토벤 소나타 32곡 전곡 연주를 한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4년만에 여는 독주회다. “내 자신을 닦고 큰 덩어리를 만들어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작곡가에요. 바흐와 베토벤이 30대 때부터 숙제였는데 바흐는 너무 겁이 나서…”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지금 와서 내가 한다고 될까? 이렇게까지 해야할까? 하는 생각과 계속 싸우고 있다”고 했다. 20여년 전 연주 무대가 끊임없이 이어질 때는 하지 않았던 생각이다. “그때는 ‘또 연주야? 연주 해야지’ 이 정도 생각으로 계속했던 것 같아요.” 백혜선은 “이제는 나를 위해 무대를 만들어주고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고 했다. 내년 베토벤 소나타 시리즈는 직접 해설을 하며 연주할 계획이다. “조금만 알고 들으면 느낄 수 있는 베토벤의 감동을 정확히 전해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이렇게 백혜선이 돌아왔다. 26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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