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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갈이 헌터’ 서울시 민생사법경찰 추석 특별 단속 동행기

중앙일보

입력

“의심되는 가게 두 개 발견했습니다. 두 곳 모두 (가게) 문은 닫혀있는데 입구에 박스가 많이 쌓여있었습니다.”

사법권 지닌 식품 단속 공무원들 #추석 전까지 대형시장 20곳 감시 #소매상인으로 위장해 시장에 잠행 #원산지 속임수 방지하는 게 목적

지난 25일 오후 11시30분쯤 서울 청량리청과물시장 내 주차장. 주차장에 있는 차량 안에서는 긴밀한 대화가 오고 갔다. 5분가량의 대화가 끝나자 한 남성은 가방에서 모자와 조끼를 꺼내더니 입었다. 변장을 마친 이들은 각기 흩어져 시장 곳곳을 둘러봤다.

서울시 민생사법경찰 수사관이 몰래카메라가 장착된 안경을 쓰고 촬영한 영상을 캡처했다. '박스갈이'를 하는 것으로 의심됐으나 확인 결과 아니었다. [사진 서울시]

서울시 민생사법경찰 수사관이 몰래카메라가 장착된 안경을 쓰고 촬영한 영상을 캡처했다. '박스갈이'를 하는 것으로 의심됐으나 확인 결과 아니었다. [사진 서울시]

청량리청과물시장에는 자정을 넘겨서까지 과일상자 등을 잔뜩 실은 화물트럭이 오갔다. 트럭이 정차하면 이를 기다린 시장상인들이 분주히 과일상자를 옮겼다.

변장한 이들은 시장을 누비며 시장 상인에게 말을 건넸다. 한 중년 남성은 “사과 한 상자 시세가 어떻게 돼요?”, “너무 비싸다, 왜 자꾸 가격이 올라?”라고 말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돌아다니다가 과일용 빈 박스가 적재된 가게 옆에 필기도구로 표식을 남기기도 했다.

주차장에서 변장을 했던 중년 여성은 가게들 앞에 쌓여 있는 과일박스를 훑어봤다. 이 여성은 과일의 상태를 자세히 보는 척하며 안경을 썼다. 한 시간 넘게 시장을 둘러본 이들은 유유히 다음 장소인 가락시장으로 떠났다.

서울시 민생사법경찰 수사관들이 27일 청과물 소매상으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다. 신헌호 기자

서울시 민생사법경찰 수사관들이 27일 청과물 소매상으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다. 신헌호 기자

사실 이날 청과물 소매상인으로 변장한 이들은 ‘박스갈이 헌터’인 서울시 민생사법경찰단 식품안전수사팀 수사관들이다. 중년 여성이 갑자기 안경을 쓴 이유는 박스갈이 현장을 몰래카메라로 찍기 위해서였다. 박스갈이는 원산지를 속이기 위해 청과물 박스를 바꾸는 행위를 말한다. 인기 산지에서 난 것으로 속이면 더 잘 팔린다. 값을 더 받을 수도 있다.

최성욱 수사관을 비롯해 노재규·박혜성 수사관이 한 팀으로 움직였다. 청량리청과물시장과 가락시장을 돌며 세 시간에 걸쳐 단속을 벌였지만 박스갈이로 적발된 상인은 없었다. 의심되는 가게 3개를 포착하기는 했다. 이 가게들은 예의주시 대상이 됐다. 18명으로 구성된 원산지 허위표시 특별 단속팀은 10월 2일까지 운영된다.

최성욱 수사관은 “과거에는 수입산 청과물을 국산으로 둔갑시켰으나 최근에는 국산 청과를 더 유명한 산지 것으로 갈아 끼운다는 첩보가 있다”며 “의심되는 가게를 지속적으로 관찰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서울시 민생사법경찰단 식품안전수사팀은 추석을 맞아 원산지를 허위로 표시해 이윤을 남기는 일당을 적발하는 ‘수사팀’이다. 수사팀 수사관들은 단속이 시작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동한다. 민사경은 경찰의 수사권이 미치기 어려운 업무에 대해 단속 권한을 위임을 받고 활동하는 공무원이다.

서울시 민생사법경찰단 수사관의 가방. 그 안에는 위장할 때 입는 옷, 몰래카메라가 장착된 안경, 현행범 체포용 수갑 등이 있다. [사진 서울시]

서울시 민생사법경찰단 수사관의 가방. 그 안에는 위장할 때 입는 옷, 몰래카메라가 장착된 안경, 현행범 체포용 수갑 등이 있다. [사진 서울시]

박스갈이를 단속하는 수사관의 주요 수사 방식은 ‘언더커버(위장)’다. 필요에 따라서 잠복근무도 한다. 언더커버 방식을 사용하는 이유는 정당하게 영업하는 상인들에게 피해 주지 않는 범위에서 현장을 포착하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수사관들은 소매상인 행세를 하면서 증거 동영상과 사진을 확보한다. 증거를 확보하는 데 몰래카메라가 장착된 안경과 펜 등이 사용된다. 이들의 가방에는 모자, 조끼, 슬리퍼 등이 들어있다. 소매상인으로 변장하기 위한 물품들이다. 한 번 둘러본 곳을 재방문할 때는 시간 간격을 두고 옷을 갈아입고 접근한다. 차량은 가급적이면 먼 곳에 주차한다. 박스갈이로 의심되는 가게를 포착했으나 가게 문이 열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신들만이 알 수 있는 표시를 해둔다.

서울시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2년부터 2017년 1월까지) 명절 시기에 식품 관련 불법 행위로 143명이 입건됐고, 그중 6명이 구속됐다. 하지만 박스갈이(원산지 허위표시) 적발 사례는 없다. 박스갈이는 순식간에 작업이 끝나버리기 때문에 첩보를 입수해도 현장에서 증거를 잡지 못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물량에 따라 박스갈이를 하는 시간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5~10분에 끝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단속하는 이유는 예방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백용규 민생사법경찰단 식품안전수사팀장은 “상인들도 단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장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사관들이 활동하는 자체가 경각심을 주기 때문에 원산지 허위표시를 방지하는 데 효과가 있다”며 “선량한 국민과 상인들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신헌호 대구일보 기자 shin.he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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