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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랑'을 닮은 아름다운 문장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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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사랑' 김양희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시인의 사랑' 김양희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매거진M] ‘시인의 사랑’(9월 14일 개봉) 김양희 감독은 ‘누구나 마음에 시 한 편 숨겨두고 산다’고 믿는다. 제주도에서 아담한 헌책방(가게 이름도 ‘시인의 사랑’)을 운영하는 김 감독이 다섯 편의 시와 하나의 에세이를 손수 골라 추천서와 함께 보내왔다.
그가 열렬히 사랑했으며, ‘시인의 사랑’을 만드는 데 단초가 된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무료한 명절에, 영화 ‘시인의 사랑’과 함께 읽으면 더없이 좋을 듯.

'시인의 사랑' 김양희 감독이 꼽은 #나를 흔든 시

백반
        -김소연

그 애는
우리, 라는 말을 저 멀리 밀쳐놓았다
죽지 못해 사는 그 애의 하루하루가
죽음을 능가하고 있었다

풍경이 되어가는 폭력들 속에서
그 애는 운 좋게 살아남았고
어떻게 미워할 것인가에 골몰해 있었다
그 애는 미워할 힘이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번번이
질 나쁜 이방인이 되어 함께 밥을 먹었다
그 애는 계란말이를 입안에 가득 넣었다
내가 좋아하는 부추김치는 손도 대지 않았다

어떤 울먹임이 이젠 전생을 능가해버려요
당신 기침이 당신 몸을 능가하는 것처럼요

그랬니……
그랬구나……

우리는 무뚝뚝하게 흰밥을 떠
미역국에다 퐁당퐁당 떨어뜨렸다

그 애는
두 발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했다
잘못 살아온 날들과 더 잘못 살게 될 날들 사이에서
잠시 죽어 있을 때마다

그 애의 숟가락에 생선 살을 올려주며 말했다
우리, 라는 말을 가장 나중에 쓰는
마지막 사람이 되렴

내가 조금씩 그 애를 이해할수록
그 애는 조금씩 망가진다고 했다
기도가 상해버린다고

-『수학자의 아침』(문학과지성사)

'시인의 사랑'

'시인의 사랑'

추천합니다 

“영화 속 제삿집에서 시인(양익준)과 소년(정가람)이 함께 밥을 먹을 때의 정서랑 너무나 유사한 느낌의 시입니다. 절망을 삼키고 있는 소년에게 어찌할 도리 없이 끌리는 시인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이런 시가 흐르고 있지 않을까요.”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중략)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중략)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산책방)

추천합니다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시는 그런 시인의 운명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서동욱의 시 '입맞춤'에 대하여
                                     -현택훈

중학교 2학년 봄방학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죽은 어머니의 손에서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보름 동안 누워 있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점점 몸이 굳어가던 할아버지는 막내 손자인 나에게 손목을 주물러 보라고 했다. 아무 감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할아버지는 막막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불교에서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죽으면 그 영혼이 자신의 업에 따라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서동욱의 시 ‘입맞춤’에서는 임종을 지키는 사람의 자세가 나온다. 누군가 저 막막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우주선을 탄 것처럼 죽음 이후의 세계로 떠나려 할 때, 우리는 우리 안의 가장 큰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가장 강렬한 연애를 하는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아주고 키스를 하고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는 것이다. 키스로 태어난 우리에게 임종의 순간의 눈빛들은 모두 입맞춤이다.

-제주불교 2017년 5월 31일자

추천 시집은 『남방큰돌고래『(한국문연)

'시인의 사랑'

'시인의 사랑'

추천합니다  

“임종의 순간, 그 먹먹하고 애절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글입니다. 영원한 이별 위에 놓인 그 거대한 슬픔을 조금만이라도 더 따뜻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시인의 사랑’에도 이런 자세가 나옵니다).”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시인의 사랑'

'시인의 사랑'

추천합니다

“감각이 예민했던 유년 시절, 혼자 지냈던 어느 밤을 떠올리게 하는 시입니다. 그날의 냄새·온도·소리까지 모두 다 소환해내어 울컥하게 하는.”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최승자

(중략)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을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꺽어지기 위하여.

(중략)

-『즐거운 일기』(문학과지성사)

'시인의 사랑'

'시인의 사랑'

추천합니다

“달콤하고 낭만적인 사랑만이 사랑은 아닐 겁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려도 기꺼이 밟혀주고 끝까지 기다리는…, 그렇게 처절하기 때문에 사랑인, 그런 사랑도 있겠지요. 영화 속 강순(전혜진)의 모습을 이 시에서 봅니다.”

'시인의 사랑'

'시인의 사랑'

금기
           -이성복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추천합니다

“치열한 사랑을 떠나보내고 아직도 그 사랑의 그림자 안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영화 ‘시인의 사랑’에서도 시인은 사랑을 잊었다는 담담한 시를 한 편 쓰고는 갑자기 터지는 슬픔으로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그렇게 사랑의 잔향은 언제까지나 지속됩니다.”

정리=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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