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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인터뷰] '독도연구' 한 평생 최서면 명지대 석좌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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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일 수교 40년, 연륜으로는 흔들림 없이(不惑) 반석에 올라야 할 한·일 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다.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의 날' 제정으로 촉발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4년 만에 재연된 역사 왜곡 교과서 파문 때문이다. 한·일 양국 정치인들과 교분을 쌓으며 평생을 독도 연구와 한·일 관계 사료 발굴에 매달려 온 원로 학자는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최서면(77.崔書勉) 명지대 석좌교수 겸 국제한국연구원 이사장을 만나 한·일 양국 정부와 국민에게 주는 메시지를 들었다.

-일본 정치인들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서 해결하자고 주장합니다.

"4년 전 한 파티장에서 주일 러시아 대사가 나를 보더니 대뜸 '이제 한국 사람들의 얘기를 알아듣겠다'고 하더군요. 일본 사람들과 쿠릴열도 4개 섬 문제를 토론하던 중 '정 합의가 안 되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했더니 일본 사람들이 '왜 우리 고유 영토인데 가느냐, 말도 안 된다'고 대답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일본이 독도에 대해서는 계속 국제사법재판소를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자신들의 입장이 약하다는 방증입니다. 개인과 개인의 분쟁에서도 재판소에 가자는 소리를 약자가 먼저 하지 않습니까.

일본이 이 주장을 먼저 꺼낸 게 1950년대인데 그때 제시한 근거는 후속 연구에 의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일본 학자들도 부정하고 있거든요.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에 새로운 근거가 있으면 제시해 보라고 요구하는 게 현명한 대응책입니다."

-일본이 독도를 고유 영토로 주장하는 근거가 엉터리로 밝혀졌다는 얘긴가요.

"일본 정부의 고유 영토론의 바이블에 해당하는 책은 66년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가 편찬한 '다케시마의 역사지리학적 연구'입니다. 외무성의 협조로 방대한 문헌을 조사해 집대성한 책이죠.

거기엔 조선시대 공도(空島) 정책으로 비어 있던 울릉도와 무인도인 독도에 일본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면서 고기잡이를 했다는 고문헌 기록이 많이 제시돼 있습니다.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일본 정부가 스스로 여러 차례 도항 금지령을 내리고 영유권을 부정했다는 것입니다. 1837년 아이즈야 하치에몬(會津屋八佑門)이란 사람이 이를 어기고 울릉도까지 갔다온 뒤 처형당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고문서가 있더라도 그건 잠상(潛商), 지금 말로 하면 밀무역에 지나지 않고 영유권과는 상관없는 기록이라는 것이죠.

보다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가와카미는 92㎞나 떨어졌는데 그럴 리 있느냐, 그건 독도가 아닌 다른 섬을 말하는 것이라며 꼬투리를 잡습니다. 한국 측 기록이 엉터리라는 거지요. 나도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울릉도의 한 교사가 실제로 독도 사진을 찍었습니다. 평지에선 안 보이지만 조금만 높이 올라가면 지금도 보입니다. 전망대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실록의 기록을 믿어야지요."

-일본도 고지도를 근거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내가 지금까지 수집하거나 확인한 일본 고지도만 해도 1000여 점이 넘습니다. 그중엔 물론 일본 땅으로 표시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도 자체가 엉터리라면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측량기술이 없던 시대에 잘못된 지도를 서로 베껴 엉터리가 확대 재생산된 경우도 많습니다.

영유권 다툼에서 제일 권위가 있는 것은 정부가 편찬한 관찬(官撰) 지도입니다.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관찬 지도를 모두 네 번 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독도.울릉도가 나오는 지도는 한 장도 없습니다.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란 사람이 만든 마지막 관찬 지도는 정확성 면에선 지금도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지도인데 거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독도 대응책은 양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실효 지배를 하고 있으니 차라리 무시하는 것이 좋다. 일일이 반응하면 오히려 분쟁지역으로 삼으려는 일본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라는 입장이 전통적으론 우세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강력 대응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나라 국민이든 영토를 지키려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잘못 알고 떼를 쓰는 것은 바로잡아 줘야지요. 한국 정부는 구체적인 자료를 일본에 소개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전에 내 강연을 들은 한 자민당 국회의원은 '그동안 너무 몰랐다. 이제 다시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말하더군요. 인내심을 갖고 계몽하면 이해하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과잉대응해 적이 아닌 사람까지 적으로 만드는 것은 서투른 방법입니다."

-역사 교과서 문제는 이제 4년마다 한 번씩 반복되게 돼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근본 원인은 무엇입니까.

"일본의 전범 재판은 연합국이 했지 일본인 스스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 국민의 전쟁 범죄에 대한 인식이 불충분한 상태였는데 국제 정세에 따라 일본과 미국이 급속히 가까워지면서 반성의 여지가 사라져 버린 거지요.

이런 현상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근본 원인은 교육에 있습니다. 좌파는 전쟁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고 반성하지만 비좌파는 반성을 하지 않는 양상이 교육의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교과서에 일본의 반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과거사 문제는 언제든 재연할 수 있는 혼란의 요인입니다."

-일본에선 이미 여러 차례 사과했는데 또 하라고 하니 불쾌하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일본인에게 많이 받는데 나는 그때마다 단호하게 얘기합니다. 왜 당신들은 한 번에 못 끝내느냐, 당신들은 사과한 횟수를 세고 있는데 나는 총리의 사과가 다른 각료들의 망언에 의해 부정당한 횟수를 세고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각료들의 망언이 있으면 총리가 장관을 바꿔 극복해 나갔는데, 요즘 정부는 그런 성의도 보이지 않는군요.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도 총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엔 전쟁 희생자에게 조의를 표하는 기관이 두 곳 있는데 하나는 A급 전범도 같이 모신 야스쿠니 신사이고 하나는 지도리가부치(千鳥淵)의 무명 용사 묘지입니다. 이 두 곳 가운데 일왕은 절대 야스쿠니에 가지 않고 지도리가부치에만 갑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우린 일본 사람에게 이런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위해선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일본은 더욱더 진정한 반성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들을 가르쳐 주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들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화부터 내는 건 건강한 방법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에게는 아직 풀리지 않는 한이 있다, 이를 안 풀어 주면 화합도 없고 미래 지향도 없다, 그렇게 설득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본이 침략을 잘못한 일이라고 알게 하는데 40여 년이 걸리지 않았습니까."

-한국과 일본은 숙명적으로 늘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견해도 있던데요.

"나는 일본에 오래 살면서 한.일 양국이 충돌하는 순간을 많이 봤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결됐느냐면 일본 안에서 한국을 소중히 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러지 말고 우리가 참고 타이르자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문제가 풀리더군요. 중요한 것은 싸워도 미래 지향이란 대전제 하에 싸워야 한다는 겁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과 우호를 소중히 여기고 한국 문화를 존중하는 일본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망언이 전체 국민을 대변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길게 봐야 합니다. 일본은 왕인 박사를 비롯해 우리 선조가 건너와 만든 나라이므로 그 문화의 근저에는 어딘가 우리하고 같은 것이 있다는 인식을 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침묵하는 양심이 목소리 큰 비양심 세력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나는 일본에서 안중근연구회를 만들고 강연하러 다녔습니다. 안중근이 누굽니까. 일본인이 가장 존경한다는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하지 않았습니까. 가만뒀으면 교육자로 삶을 끝냈을 사람이 왜 그렇게 됐느냐, 그 동기는 당신들이 제공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당신들이 안중근을 다시 연구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요즘은 안중근을 흠모하고 평가하는 일본인이 많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런 것이 한.일 간에 맺힌 앙금을 해소하는 씨앗이 된다고 봅니다."

-한.일 관계에 교훈이 될 만한 사례가 있나요.

"문세광 사건의 경우가 대표적이지요. 국교 단절 주장까지 한국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일본도 우리가 뭘 잘못했느냐며 반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이 극단으로 가서는 안 된다면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한국에 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과했지요. 그것이 계기가 돼 한.일 관계는 회복됐습니다. 시나 외상의 용기가 지금 이 난국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하다고 봅니다."

만난 사람 = 예영준 도쿄특파원

*** 최서면 석좌교수는

‘걸어 다니는 사전’으로 불릴 정도로 한일 관계사 및 독도 연구 권위자. 1957년부터 일본에 살면서 안중근 의사 옥중수기, 명성황후 시해 관련 사료,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있던 북관대첩비 등 숱한 사료를 직접 발굴했다. 한일 양국의 거물급 정치인과의 깊은 친분으로 공식 외교의 막후에서 자문·조정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에 국제한국연구원을 설립한 뒤에는 한일 양국을 오가며 사료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최근 10년동안은 도쿄 도심의 외교사료관 서고에 묻힌 한국 관련 자료를 섭렵하고 방대한 목록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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