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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연합군’ 손잡은 애플, 도시바 매각 원점으로 돌렸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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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부 매각 협상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31일 도시바가 도시바 메모리 매각과 관련해 ‘신(新)미·일 연합’과 ‘한·미·일 연합’, ‘훙하이 연합’ 등 3개 진영과 협상을 다시 진행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도시바가 이달 중으로 신미일 연합에 독점 교섭권을 부여할 거라던 시장의 예측은 또 한번 빗나갔다.

한·미·일 연합에 3조 투자한 애플 #“WD에 넘기지 말라” 압박 새 판 짜기 #기존 3개 진영과 재협상 진행 예정 #SK측선 WD와 컨소시엄도 검토

협상 판도가 바뀐 건 이번이 세번째다. 처음 승기를 잡은 건 미국 사모펀드 베인캐피털과 SK하이닉스가 이끄는 한미일 연합이었다. 6월 말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될 때까지만 해도 “곧 계약서를 작성할 거 같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7월 중순 분위기는 돌변했다. 도시바 측은 “웨스턴디지털(WD), 훙하이 측과도 협상을 재개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초 융자 형태로 돈만 대는 걸로 알려졌던 하이닉스가 향후 지분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WD가 합작 회사를 빌미로 “우리 동의 없이는 못 판다”며 소송을 걸고 늘어진 점 등이 발목을 잡았다. 최근 일본에선 “도시바 메모리는 신미일 연합에 넘어가게 됐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어서 회사를 팔아 빚을 갚으라”는 채권단의 압박을 못 이겨 속도전을 택했다는 분석이었다.

분위기를 역전시킨 건 애플이다. 애플은 최근 3000억엔(3조1500억원)을 대기로 하고 한미일 연합에 동참했다. 애플의 참여는 단순한 투자자 확보 이상의 의미다. 도시바 낸드플래시 메모리의 최대 고객 중 하나인 애플이 도시바에 “WD에 회사를 넘기지 말라”고 압박을 하고 나섰다는 뜻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시장조사기관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2분기 기준 WD의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은 17.5%로 도시바와 같다. 두 회사가 합칠 경우 시장 점유율은 36%에 육박한다. 같은 기간 시장 점유율 35.6%를 기록한 삼성전자와 양강 체제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한미일 연합 핵심 관계자는 “반도체 시장 핵심 고객들이 얼마나 반도체 업계의 쏠림 현상을 경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며 “가뜩이나 공급자 중심으로 재편되는 낸드플래시 시장이 균형을 잃을까봐 견제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애플이 한미일 연합에 합류한 또다른 이유는 안정적인 낸드플래시 공급처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스마트폰 등 주요 전자제품은 갈수록 데이터 저장용량이 급격히 늘어나 고용량 낸드플래시 확보 경쟁이 치열하다. 송용호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최근의 낸드플래시 수요 증가세를 보면 주요 전자제품 업체들은 ‘낸드가 없어 제품을 못 만드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을 느낄 정도”라며 “애플로선 반도체 시장에 발을 담가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하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일 연합은 ‘균형과 성장’을 주창하며 도시바 이사회를 설득, 막판 역전극을 펼치겠다는 전략이다. 도시바의 경영권을 최대한 보장해주되, 서로 기술적 시너지를 얻으며 동반 성장하자는 것이 SK하이닉스 등 한미일 연합의 청사진이다.

한미일 연합의 최종 노림수는 WD를 포섭해 ‘신(新) 한미일 연합’이라는 그랜드 컨소시엄을 형성하는 것이다. 반도체 시장의 쏠림 현상도 막고, “특정 국가에 일본 기술 빼앗긴다”는 일본 여론도 달래면서, 빠른 시간에 협상을 매듭지을 수 있는 ‘신의 한 수’다. 한미일 연합 관계자는 “처음부터 합작 회사를 보유한 WD와 손을 잡으려 했지만 도시바의 지분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WD 측과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원활히 진행되지 않았다”며 “애플 같이 시장의 균형을 원하는 고객들의 목소리를 감안해 WD가 전향적 결정을 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소프트뱅크·구글과 손잡고 가장 높은 인수 금액(3조엔)을 써 낸 대만의 훙하이정밀공업(폭스콘)은 새로운 검토 단계에서도 그리 가능성이 높진 않아보인다. 현재 도시바의 상황에선 급전이 중요하지 액수는 나중 문제란 얘기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2년 연속 자본잠식 상태인 도시바는 내년 3월 말까지 반도체 매각을 마무리 해 현금을 채워넣어야 도쿄 증권거래소 상장 폐지를 피할 수 있다”며 “중국계 반도체 회사에 매각을 시도했다간 여론에 발목이 잡혀 매각 작업이 더 지지부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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