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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맘충에게 살충제를 뿌렸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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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요즘은 무슨 벌레가 그리 많은지. 맘충(어린 자녀 키우는 엄마)·급식충(급식 먹는 중·고등학생)·한남충(한국 남자)·틀딱충(틀니 사용할 정도의 노인)…. 징그럽고 세상 쓸모없다며 손가락질하는 걸로는 참을 수 없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며 벌레퇴치제를 여기저기 뿌려댄다. ‘노키즈존’은 맘충(엄마)과 유충(아이)을 동시에 내모는 강력한 퇴치제 중 하나다. 문제 있는 벌레 몇 마리만 골라내는 게 아니라 맘충과 유충이 발붙일 싹을 자르고 재생산 고리를 끊어 아예 개체 수를 줄인다는 점에서 때론 살충제 역할까지 한다.

노키즈존의 이 같은 뛰어난 효과가 알려지면서 벌레퇴치제의 쓰임새는 점점 늘어난다. 최근엔 노키즈존의 미투상품(성공한 제품을 그대로 따라 해 내놓는 상품)인 ‘노틴에이저존(No teenager zone)’까지 등장했다. 노키즈존은 효과가 좋긴 해도 사용할 때 맘충의 소음을 유발해 시끄럽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급식충을 겨냥한 노틴에이저존은 별반 시끄럽지도 않아 소리 소문 없이 널리 쓰이고 있다. 부산의 한 유명 커피전문점을 시작으로 PC방에서 서울 압구정동의 유명 버블티 카페에 이르기까지, 이러다간 노키즈존의 인기를 조만간 넘어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다. 벌레퇴치제 덕분에 효과적으로 벌레를 차단했다고 생각했는데 벌레가 줄기는커녕 점점 더 눈에 많이 띄니 말이다. 맘충이 안 보이니 급식충이, 급식충을 차단하니 틀딱충이 출몰하는 식이다. 게다가 메갈충(페미니스트 여자) 같은 전에 없던 신종 벌레까지 속속 생겨나니 그야말로 문 밖으로 발도 못 내밀 만큼 온통 벌레 세상이 돼버렸다. 그 많은 벌레를 다 피하려면 온갖 퇴치제를 뿌려대며 나 홀로 방 안에 앉아 있는 수밖에 없다. 어라,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벌레를 쫓았을 뿐인데 왜 내가 독방에 갇혀 있는 거지?”

한 세기 전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대상이 존재하기에 그렇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관점이 대상을 창조한다고 했다. 『언어인간학』에서 김성도 교수도 언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라며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만들어진다고 했다. 벌레로 가득 찬 세상은 그렇게 불리는 온갖 ‘충’들이 만드는 게 아니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만든다는 얘기다.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