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박영만(1914∼81)은 1940년 『조선전래동화집』을 펴냈다. 나라를 잃은 백성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옛이야기를 모았다. 지금 돌아보면 낡아 보이는 구석도 많다.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이애령 전시운영과장은 이 책에 실린 ‘갈댓잎’을 읽고 “화병이 날 정도였다”고 했다.
‘갈댓잎’은 비겁한 남편의 이야기다. 첫날밤 신방에 비친 갈댓잎을 자신을 해치려는 다른 남정네의 칼로 오해하고 도망친 신랑이 등장한다. 신부의 사연은 더 기구하다. 영문도 모르고 버림받은 신부는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 죽는다. 9년이 지난 어느 날 신랑은 잘못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는 옛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남편이 반갑게 손을 잡으려는 순간, 아내의 몸은 한 줌의 재로 무너져 내린다.
아무리 일편단심(一片丹心)이라지만 신부 입장에선 너무 가혹하다. 속이 터질 만큼 답답한 여성상이다. 요즘이라면 대부분 ‘나쁜 놈’ 한마디 내뱉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지 않을까. 이애령 과장은 “주변에선 애달프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아이들에게 가장 권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고 했다. 여성은 없고, 남성만 있는 남녀의 일방적 관계 때문이다.
이렇듯 동화는 아름답지만은 않다. 우리네 볼썽사나운 모습을 드러낸다. 21세기 대명천지라고 ‘갈댓잎’에서 자유로울까. 최근 논란이 뜨거운 데이트 폭력이 대표적이다. 그제 확정된 2018년 예산안을 보면 데이트 폭력·스토킹 등의 보복 피해가 우려되는 이들의 주거지에 3억7000만원을 들여 CCTV를 설치하기로 했다. 또 재혼여성을 괴롭히는 민법 조항 ‘이혼 후 300일 내 출산, 전남편 아이 추정’(제844조 2항)이 다음달 정기국회에서 개정될지도 주목거리다.
요즘 한글박물관에서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내년 2월 18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한국 전래동화 100년을 돌아보는 자리다.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신데렐라 같은 서양동화와 달리 고생도 마다 않으며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이 많이 나온다. 옛날이 아닌 오늘의 우리 얘기도 된다. 이를테면 잔혹동화다.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세상을 물려줄 책임이 있는 어른들이 지금 다시 동화를 들어야 할 이유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