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판결' 정치 공세에 법조계 "대법원장 교체기에 부적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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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던 한명숙(73) 전 국무총리의 출소를 계기로 시작된 판결의 정당성과 사법개혁 논쟁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사법부 독립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논쟁이 불붙은 건 더불어민주당이 한 전 총리의 재판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면서다. 김현 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일어난 정치보복”으로 규정하고 “억울한 옥살이였다”고 말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3일 국회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했다. 추 대표는 이날 출소한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거론하며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오른쪽은 우원식 원내대표. 강정현 기자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3일 국회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했다. 추 대표는 이날 출소한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거론하며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오른쪽은 우원식 원내대표. 강정현 기자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소수 엘리트주의에 빠진 보신주의 사법부를 깨야 한다”고 말했고, 우원식 원내대표도 “기수․서열에 따른 사법부 문화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사법부 통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권의 이같은 반응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법원 판결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제기했다.

이창현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원합의체 의견이 엇갈린 것은 사실인정이 아니라 추가적인 증거의 효력을 다툰 것으로 억울하다는 정치권의 표현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도 동생 전세자금으로 쓴 수표를 유죄로 판단한 것에 이견이 없었다. 단지 추가적인 부분의 증거능력에 대한 법리적 판단이 엇갈렸을 뿐”이라며 “정치적 명분으로 삼으려고 법원의 적법한 판결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용상 법학교수회장(동국대 법과대 교수)도 “판결에 대한 법리적 해석과 비평은 누구나 할 수 있고 각각 다를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판결의 어느 부분에 오류가 있는지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고법 부장판사는 “만약 국정농단 사건에 유죄 판결이 내려질 경우 정권이 바뀌면 똑같이 ‘억울한 옥살이’란 주장을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때는 뭐라고 할 텐가”라며 “판결이 잘못됐다면 재심 절차를 밟으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오른쪽)가 23일 새벽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의정부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며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한명숙 전 국무총리(오른쪽)가 23일 새벽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의정부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며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개혁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여권의 포석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국회 개헌특위는 대법원장의 권한 축소를 위해 외부인이 참여하는 ‘사법평의회’를 새 사법행정기구로 제안했다. 국회와 대통령이 지명한 의원들과 법관 대표가 참여해 사법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 역할을 하는 방안이다. 법관들은 이를 사법부 독립성을 훼손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집권 여당이 재판을 잘못됐다고 하는 건 대단히 위험해 보인다. 더구나 대법원장 교체기에 이런 발언을 하는 건 새 대법원장에게 정치권에서 주문을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은 “1․2심과 대법원 전원합의체를 거쳐 판결이 내려졌고 집행까지 모두 마친 사건을 사법개혁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개별사건을 정치적 이슈로 삼는 건 여론재판으로 사법부를 통제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법부를 정치 권력에 예속시키려는 시도가 있다면 법조계에서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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