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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듯 택한 일본행, 거기서 만난 군함도 … 모두 다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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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소설가 한수산은 소설 『군함도』에 선한 일본인도 등장시켰다. 그래서 2009년 출간된 일본어판이 ‘내셔널리즘을 넘어섰다’는 일본 언론의 평을 받으며 4만 부가 팔렸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소설가 한수산은 소설 『군함도』에 선한 일본인도 등장시켰다. 그래서 2009년 출간된 일본어판이 ‘내셔널리즘을 넘어섰다’는 일본 언론의 평을 받으며 4만 부가 팔렸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군함도를 최초로 다룬 한수산의 소설 『까마귀』(2003)

군함도를 최초로 다룬 한수산의 소설 『까마귀』(2003)

스크린 독과점 논란 등으로 흥행 기세가 꺾였지만, 영화 ‘군함도’는 일제 강점기를 다시 보게 했다. 조선인 강제노역의 실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원작 소설을 제공한 건 아니지만, 영화의 뿌리에는 소설가 한수산(71)씨가 있다. 그는 군함도를 본격적으로 다룬 다섯 권짜리 장편 『까마귀』를 2003년에 펴냈다. 이를 두 권으로 대폭 개작한 『군함도』를 지난해 출간했고, 이 소설이 스크린의 상상력을 자극해 영화가 만들어졌다. 한씨는 『까마귀』 이전까지는 대중적 이미지가 강했다. 그는 어떻게 군함도를 소설로 쓰게 됐을까. 11일 한씨를 만났다.

소설 『군함도』 작가 한수산 #81년 작품 밉보여 보안사 끌려가 #노태우 대통령 당선된 뒤 한국 등져 #도쿄 고서점서 『원폭 … 』 우연히 발견 #89년부터 조선인 강제징용 파헤쳐

어떻게 소설 『군함도』를 쓰게 됐나.
“운명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1989년 일본 도쿄의 한 고서점에서 『원폭과 조선인』이라는 책자를 만났다. 일본인 인권운동가 오타 마사 하루(岡政治·1994년 사망) 목사가 이끄는 ‘나가사키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에서 펴냈는데, 일본인 특유의 집요함으로 나가사키 원폭으로 사망한 조선인이 1만~1만2000명이라는 추산치를 산출해 제시하고 있었다.”
군함도를 최초로 다룬 한수산의 소설 『까마귀』(2003·사진 위)와 이를 개작해 2016년 펴낸 『군함도』.

군함도를 최초로 다룬 한수산의 소설 『까마귀』(2003·사진 위)와 이를 개작해 2016년 펴낸 『군함도』.

한씨는 “그런 역사를 몰랐다는 자책감에 휩싸여 소설 집필에 필요한 취재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당시 일본에 살고 있었다. 81년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욕망의 거리’의 내용 일부가 빌미가 돼 군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는데 그때 보안 사령관이었던 노태우 씨가 87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듬해 고국을 등진 참이었다. “엄청난 거악(巨惡)에 눈을 떠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심의 폭을 넓혀가던 무렵 마침 군함도에 대해 알게 됐다”고 했다. 당시 군함도는 요즘에 비하면 출입이 훨씬 자유로웠다. 징용 피해자들의 나이도 70대가 많아 함께 섬에 들어가 현장 조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런 우연적인 요소들이 지금 생각하면 운명적으로 느껴진다”는 얘기였다.

왜 군함도였을까. 영화와 달리 소설은 나가사키 원폭 피해를 비중 있게 다룬다. 당시 나가사키는 일본의 군수 재벌 미쓰비시의 근거지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사용된 일본군 어뢰의 80%가 나가사키의 미쓰비시 제작소에서 만들어졌다. 병기제작소에만 조선인 징용자가 2000명 넘게 끌려와 있었다. 조선인의 원폭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군함도라 불리던 하시마 섬(瑞島)의 조선인 징용자는 500~8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옥섬이라 불렸다. 주변 해류가 거세 한 번 섬에 발을 들이면 탈출이 불가능했다. 나가사키 형무소의 죄수들을 혹독하게 부리며 군함도 탄광을 개척하던 시기의 잔재가 남아 있어 구타가 일상적일 정도로 조선인 징용자들을 잔인하게 다뤘다. 한씨는 “한 마디로 군함도는 일본 군국주의가 압축된 장소였다”고 말했다.

끔찍한 사연이 많았겠다.
“소설에도 썼지만, 극심한 고통에 처하면 모국어가 나온다. 일본인으로 여겨져 병원으로 옮겨지다 한국어로 고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버려지는 조선인이 많았다고 한다. 버려지는 조선인 시체를 까마귀 떼가 기다리다 파먹었다. 그래서 소설 원래 제목이 ‘까마귀’였다. 조선인은 어땠을까. 일본의 패망 장면을 지켜보며 잘 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그러던 중 나가사키 조선소의 일본인 중간 간부가 남긴 ‘조선소에서 자발적으로 구호대의 주체가 되어 나선 젊은 조선인 제군의 활동은 눈부신 것이었다’는 글을 발견했다. 소설 쓰라고 어깨 두드려주는 것 같았다.”
영화는 역사 왜곡 논란에도 휘말렸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지만 200명이 집단 탈출하고, 나이 어린 소년 징용자가 많이 나온다는데 그렇게 처리하지 말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광복 70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만들어진 강제징용에 관한 영화라는 점을 평가해줘야 한다. 박수 칠 일이다. 류승완 감독 버전의 ‘군함도’가 잘못됐다면 누구든 새롭게 만들면 된다.”
일본 측의 무지가 더 심각한 일 아닌가.
“전후 일본은 천황에 이어 군부의 전쟁 책임론이 차례로 국내 반발에 부딪치자 일본 국민 전체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책임 소재를 빠르게 희석시켰다. 전후 세대의 과거사 기억이 삭제됐다. 군함도는 요즘 관광지가 돼버렸다. 2차 대전 때 이미 TV·냉장고 등이 보급됐던 천국 같은 곳이었다고 홍보한다. 일찌감치 일제의 만행을 교육받는 한국의 젊은 세대와 그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일본의 젊은 세대가 어떻게 접점을 찾아 미래를 만들어나갈지 솔직히 걱정된다.”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문화 분야가 나서야 한다. 내가 소설로 썼고 영화로 만들어져 화제가 됐잖나. 연극 ‘군함도’가 전국 투어를 다니고,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좋은 노래가 자꾸 불려야 한다. 그러면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위안부나 징용 피해자 개인 차원의 손해 배상 청구 사례도 언론이 끈질지게 보도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되면 얼마나 좋겠나. 털고 가야한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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