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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추적]'살인미수 탈북자' 전자발찌 끊고 도주 열흘째 오리무중

중앙일보

입력

지난 1일 오후 3시36분쯤 대전의 위치추적관제센터. ‘전자발찌’로 불리는 위치추적 전자장치가 전남 나주에서 훼손됐다는 사실을 알리는 경보가 울렸다. 약 2분 뒤 광주보호관찰소에 이런 내용이 통보됐다. 보호관찰소 측이 112에 협조를 요청하고 현장인 나주의 한 정신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살인미수 전과가 있는 탈북자 유태준(48)씨는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보호관찰 중이던 전남 나주 모 정신병원에서 지난 1일 달아나 #경찰과 보호관찰소, CCTV 확인하고 탐문 중이지만 흔적 없어 #도로 버스내부 각종 터미널 등 전국의 CCTV 그물망 유유히 피해 #누군가 탈출 도운 조력자와 동행 가능성, 재차 월북 가능성도 #첫 탈북 후 남한 생활 중 "부인 데리러" 다시 북한 갔다 돌아오기도

신형 전자발찌 훼손 시범. [중앙포토]

신형 전자발찌 훼손 시범. [중앙포토]

보호관찰소 측이 현장에 도착한 건 이날 오후 4시10분쯤. 병원 주차장 인근 풀숲에서 훼손된 전자발찌가 발견됐다. 주변에는 벽돌 2개가 놓여 있었다. 경찰과 보호관찰소 측은 돌가루가 묻은 전자발찌를 수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식을 의뢰했다. 또다른 훼손 도구가 있었는지 가리기 위해서다.

유씨는 이력이 특이한 탈북자다. 그는 1998년 12월 처음 탈북했다. 그러나 2000년 6월 "북한에 남아 있는 아내를 데려오겠다"며 입북했다. 북한으로 돌아갔던 유씨는 2002년 2월 재차 탈북해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당시는 흔치 않았던 재입북자여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소문까지 돌았지만 확인된 건 없었다. 다만 당국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남과 북을 내집드나들듯 자유롭게 오갈 정도로 신출귀몰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살인미수 전과가 있는 탈북자 유태준씨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병원 인근 주차장. 프리랜서 장정필

살인미수 전과가 있는 탈북자 유태준씨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병원 인근 주차장. 프리랜서 장정필

정신 질환 증세가 있던 유씨는 두 번째 탈북 이후인 2004년 7월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김정일 장군님 품으로 돌려보내달라”며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해 10월 자신의 아들 양육 문제로 말다툼 끝에 이복동생을 흉기로 찌른 혐의(살인미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치료감호 10년 처분을 받았다.
 “국정원이 나를 납치했다”며 피해망상 증세를 보이던 유씨는 치료감호가 끝나고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아 지난해 3월부터 전자발찌를 찬 채 병원에서 보호관찰을 받아왔다.

경찰은 독특한 배경을 가진 유씨의 추가 범행이나 재입북이 우려된다고 판단해 유씨를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병원 건물에 설치된 폐쇄회로TV(CCTV) 녹화 자료를 확인한 결과 유씨가 주차장 인근 풀숲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드러났다.
체크무늬 남방에 흰색 환자복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유씨가 사라진 시간대는 환자들이 병원 건물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오후 산책시간대였다.풀숲을 넘으면 도로가 난 민가와 야산이 나온다.

살인미수 전과자인 유태준씨가 전자발찌를 끊고 사라진 현장을 수색 중인 119 수색견. 프리랜서 장정필

살인미수 전과자인 유태준씨가 전자발찌를 끊고 사라진 현장을 수색 중인 119 수색견. 프리랜서 장정필

그런데 베테랑 형사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병원 인근 곳곳에 CCTV가 여러대 설치돼 있었는데도 유씨의 모습이 전혀 포착되지 않은 것이다. 시내버스도 마찬가지였다. 유씨의 행방을 쫓는 데 도움이 될만한 어떠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홍길동처럼 감쪽 같이 사라진 것이다.
유씨의 병실에는 그가 쓰던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소지품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광주보호관찰소 관계자는 “전자발찌를 구성하는 부속 장치 중 하나인 착용자용 휴대통신장치에다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탐문 수사에도 돌입했다. 그가 평소 병원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병원 측에 따르면 유씨는 입원 초기 주변 환자들에게 자신이 탈북자라는 사실을 알리며 "국정원에 납치됐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환자들이 간첩 취급을 하자 대화를 거의 끊고 혼자 지냈다고 병원 측은 전했다. 병원 관계자는 ”유씨는 의료진에게도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할 뿐 거의 말이 없는 환자였다”고 했다.

전자발찌와 주변 기기. [중앙포토]

전자발찌와 주변 기기. [중앙포토]

경찰은 사라진 유씨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아무것도 확보되지 않자 도주 나흘째인 지난 4일 공개수배에 돌입했다. 결정적인 제보자에게 최고 50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경찰은 유씨의 키(165cm)와 몸무게(68kg), 얼굴 사진, 도주 당일 옷차림 등 정보가 담긴 전단을 배포했다. 전국 곳곳에서 유씨와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그러나 모두 다른 사람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엉뚱한 사람이 유씨로 오인되기도 했다. 생김새가 매우 비슷하고 한국말이 서툴러서다. 광주 종합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로 갔던 용의자는 유씨가 아닌 동남아인이었다. 현재까지 유의미한 제보는 전혀 없는 상태다.
10일은 유씨가 사라진 지 열흘째되는 날이지만 첫날과 마찬가지로 유씨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경찰과 보호관찰소 측에서 매일 50명 안팎의 인원을 투입하고 119에서 수색견까지 동원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다.

전자발찌 훼손사건 현황. [중앙포토]

전자발찌 훼손사건 현황. [중앙포토]

유씨 증발 사건이 워낙 미스터리다보니 일각에서는 누군가 탈출을 도운 조력자가 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도피를 준비해온 유씨가 풀숲을 빠져나와 CCTV 사각지대에서 미리 대기 중인 누군가의 차량에 탑승해 다른 지역으로 유유히 빠져나갔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과거 행적에 비춰보면 재차 월북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아들 양육 문제로 갈등을 겪던 이복동생에게 또다시 범행을 하기 위해 병원을 탈출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경찰은 남한에 거주 중인 유씨의 아들과 어머니·이복동생 등 3명에 대한 신변 보호에 들어갔다.

공개수배 전단. [사진 광주보호관찰소]

공개수배 전단. [사진 광주보호관찰소]

경찰 관계자는 “여러 수사 기법을 동원해 유씨의 흔적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고 있다”며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 최대한 빨리 검거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나주=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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