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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방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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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효용성뿐만 아니라 상징적 의미가 큰 것이 불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절대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불을 신성시한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임금들은 24절기 중 하나인 청명절에 전국의 관청과 대신들에게 불을 나눠주는 의식을 가졌다. "새 불로 새봄을 맞자"는 바람에서다. "새 불로 지금까지의 낡은 관행을 모두 없애버리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기존에 있던 불이 아닌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서로 문질러 새 불을 지펴 분배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불은 파괴이자 창조인 것이다.

조선시대 때는 불을 내 재산이나 인명을 해치는 행위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 세종은 병오년(1426년)에 한성부 민가에서 큰불이 발생하자 방화법을 만들고, 지금의 소방방재청 격인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설치했다. 당시 세종은 한성부 화재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수십 명을 붙잡아 극형에 처했다. 이후 민가 등에서 일어나는 화재는 사소한 것이라도 일일이 임금에게 보고해야 했다. 성종(1469~1494년)은 요즘 말로 '방화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방화범에 대해서는 최고형으로 다스렸다. 범죄별 형벌이 기록된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민가나 관가의 창고 등에 불을 질러 재산상 큰 피해를 끼친 방화범은 도끼나 칼로 목을 베어 죽이는 참형에 처했다. 노비가 주인집에 불을 낼 경우 목을 매는 교살형으로 처벌했다. 자신의 집에 고의로 불을 내면 곤장 100대를 때렸고, 이웃에게까지 피해를 줄 경우 곤장 100대에 3년간 유배형을 더했다. 당시 정치범 등 중형의 죄인에게 곤장 100대에 유배형을 내렸고, 절도 등 잡범이 곤장 10~50대를 맞은 점을 감안할 때 방화범에 대해서는 엄하게 처벌한 것이다.

지난 5년간 방화로 인한 화재사고가 연평균 3063건으로, 매년 5.5%씩 늘어나자 당국이 '방화사건 특별경계령'을 발령했다. 인명피해의 경우 사망은 연평균 32.5%씩, 재산피해는 12.9%씩 증가하고 있다. 당국은 방화를 살인.강도.강간과 함께 4대 강력범죄로 간주해 법정 최고형으로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새벽 시간대를 이용해 차량.지하철.점포.야산 등을 태우는 '묻지마 방화'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방화광들은 불을 통해 아픔과 희열을 동시에 느낀다고 한다. '방화의 즐거움'은 고통 속의 쾌락인 셈이다. 불을 섬겼던 조상의 지혜가 필요한 시기다.

박재현 사회부문 차장